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거인체육관’ 사무실에 들어서니 챔피언벨트 3개가 한눈에 들어왔다. 김주희(23)가 지난 9월5일 여자국제복싱협회(WIBA), 여자국제복싱연맹(WIBF), 세계복싱연합(GBU) 라이트플라이급 3개 기구 통합 세계타이틀전에서 한꺼번에 따낸 것이다. 당시 김주희는 경기 뒤 정문호(50) 관장에게 큰절을 올렸다. 이어 “관장님은 내가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11년째 지도하고 계신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소개했다.
체육관 찾은 중학생“돈 걱정 말고 나와라”발가락 골수염 수술“한번만 더해 볼게요”3대 복싱기구 MVP내년 스승과 석사과정■ 1999년 12월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었다. 언니가 다니던 거인체육관에 언니의 운동복을 찾으러 갔다가 정 관장과 처음 대면했다. “그렇게 예쁜 애가 들어올 수가 없었어요.”(정 관장) “거짓말 …. ㅎㅎ.”(김주희 선수)
1년 뒤, “어디서 봤다 싶은 아이가”(정 관장) “한 달 정도 다녀 볼 심산으로”(김주희) 체육관을 다시 찾았다. 한 달 5만~6만원의 회비는 언니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줬다. 네 살 터울의 언니는 편찮으신 아버지와 이혼하고 재가하신 어머니를 대신한 김주희의 후견인이었다. 하지만 서너 달이 지나면서 회비를 낼 수 없었다. 그때 정 관장은 “돈 걱정하지 말고 나오라”고 했다.
정 관장은 운동만 가르친 게 아니었다. 영어단어 시험을 봐서 100점을 맞으면 2000원씩 용돈도 줬다. 틈만 나면 “만화책이라도 좋으니 책을 많이 읽으라”고 권했다. 정 관장에게는 김주희와 동갑내기 딸이 있다. 김주희는 “관장님은 좋은 책이 나오면 두 권을 사서 저와 따님에게 한 권씩 선물했다”고 했다.
■ 2004년 12월 김주희는 국내 여자선수 1호로 프로복싱 자격증을 땄다. 프로에 데뷔한 김주희는 승승장구했다. 국제여자복싱협회(IFBA)와 세계복싱협회(WBA), 여자국제복싱협회 세계타이틀을 잇따라 거머쥐었다.
하지만 그 무렵 그의 오른발 엄지발가락은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시뻘건 독이 올라 허벅지까지 퉁퉁 부었다. 발가락 골수염이었다. 고열로 식은땀을 흘리며 수술대에 올랐다. 마취가 풀리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 정 관장은 ‘너무 가여워 이제 복싱 그만 시켜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김주희를 휠체어에 태우고 공원으로 나갔다. 정 관장이 한마디 했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김주희는 울먹이며 말했다. “딱 한 번만 더 해보겠다”고.
재활에 들어갔다. 정 관장은 3층 체육관까지 김주희를 업고 다녔다. 수술 환자에게 좋다는 미꾸라지 보양식도 해먹였다. 그리고 마침내 재기에 성공했다.
■ 2009년 12월 김주희는 올해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세계 여자프로복싱 역사상 처음으로 5개 기구 챔피언 벨트를 휘감아 본 선수가 됐고, 연말에는 3대 복싱기구의 ‘올해의 선수’에 잇따라 선정됐다. 김주희는 “집안 형편이 넉넉했거나 어머니가 계셨다면 복싱을 못했고, 관장님도 못 만났을 것”이라며 ‘운명’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정 관장은 “김주희가 나를 만난 게 행운이 아니라 김주희 같은 제자가 있다는 게 나에겐 큰 행복”이라고 했다.
거인체육관은 정 관장의 선친 고 정석재 선생이 1959년 설립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복싱체육관이다. 정 관장은 가업을 이어받았고, 챔피언급 제자만 30~40명을 길렀다. 김주희는 그중 유일한 세계챔피언이다. 김주희는 내년 2월27일 한 체급을 내려 미니플라이급(47.6㎏) 3대 기구 통합 챔피언에 도전한다.
정 관장은 김주희의 ‘은퇴 이후’까지 생각하고 있다. 그는 “교수까지 시키려고 한다”고 했다. 김주희는 내년 2월 중부대 엔터테인먼트학과를 졸업한다. 이미 경희대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한 정 관장도 올해 김주희가 다니는 학과에 4학년으로 편입했다. 둘은 내년에 중부대 인문산업대학원 교육학과에서 나란히 석사 과정을 밟는다.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꿈이 무르익고 있다.
글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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