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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여성

“결혼하면 퇴직” 46년 전 은행 ‘결혼퇴직각서’ 찢어버린 여자들

등록 :2022-08-18 12:00수정 :2022-08-18 19:50

인터뷰 | 책 <평등으로 가는 여정> 주인공
성차별 벽 깬 여성 행원 인권 운동사 담아
결혼·임신 이유 퇴직 거부한 여성 행원들
장도송 “노력 덜 한 거 같아 아쉬워”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장도송(86)씨의 미수(88살)을 축하하는 모임이 열렸다. 이필영(왼쪽 위·77), 김광옥(78), 노미숙(왼쪽 아래·75), 이한순(76), 장도송(86)씨. 사진 이주빈 기자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장도송(86)씨의 미수(88살)을 축하하는 모임이 열렸다. 이필영(왼쪽 위·77), 김광옥(78), 노미숙(왼쪽 아래·75), 이한순(76), 장도송(86)씨. 사진 이주빈 기자

“재직 중에 결혼하게 될 경우에는 자진 사직하겠음을 서약하겠습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은행 대부분은 여성 행원 채용 때 결혼하면 퇴직한다는 ‘결혼퇴직각서’를 받았다. ‘서른 살이 되면 그만둔다’는 각서까지 요구하는 은행도 있었다. 여성의 장기근속을 원천 차단하는 차별이었다.

1970년대 은행 직원 정년이 55살이었지만 결혼퇴직각서 때문에 여성 행원은 평균 근무 연한이 3~5년에 그쳤다. 은행은 “여성 행원은 근무 연한이 한시적이라 남성과는 마음가짐부터 다를 것이기에 인사 관리를 동등하게 할 수 없음이 당연하다”며 차별을 정당화했다. 은행은 여성 행원이 다양한 직무를 경험하지 못하도록 했다. 남성 행원이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 때 여성 행원은 서비스나 예절만 배울 수 있었다. 승진 관리를 위한 인사 고과나 연수에서도 여성 행원은 제외했다. 성차별 구조 안에서 ‘결혼퇴직각서’가 나오고, 그 각서가 다시 은행 내 성차별 구조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시험을 거쳐 승진한 은행권 첫 여성 대리인 장도송(당시나이·39)씨, 조흥은행 노동조합 여성부장 이한순(29)씨와 한국상업은행 노조 여성부장 이필영(30)씨 등은 1975년 참지 않고 목소리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언론에 공론화하기로 의기투합했다. 앞서 한국은행 총재에게도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남성 고용이 불완전한 상황에서 여성의 결혼 후 계속 근무는 ‘여성의 지나친 욕심’이니, 남성이 완전 고용될 때까지는 도리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식으로 답했다.

결혼도, 결혼 뒤 출근도 ‘결행’이 필요했던 시절

이들은 ‘선례’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금은 별것 아닌 일에도 ‘결행’이 필요했다. 1975년 11월 조흥은행 이명숙씨가 은행 역사상 여성 처음으로 결혼을 이유로 퇴직하지 않고, 휴가원을 내 결혼식을 올렸다. 장도송, 이한순씨 등은 이명숙씨에게 “우리를 믿고 휴가원을 낸 뒤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가라”고 용기를 줬다. 이런 일을 처음 겪은 조흥은행은 발칵 뒤집혔다. 다른 사례가 더 나올까 봐 노심초사하며 관련자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결혼식에 참석한 모든 여성 직원에게 시말서를 제출하라고 했고, 장도송은 버스 노선도 없는 지점으로 좌천됐다. ‘결혼퇴직각서’ 폐지 운동의 배후여서, 은행 내 여성 운동가여서 겪은 수모였다.

1976년 2월, 한국산업은행에 다니던 노미숙씨도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퇴직’은 조흥은행을 포함한 많은 은행의 ‘관례’였지만, 산업은행은 이를 ‘내규’로 박아뒀기 때문이다. 그는 동료들의 지지를 얻어 ‘결혼 후 출근’을 감행했다. 산업은행 사상 처음으로 결혼하고도 출근하는 여성이 된 노미숙씨는 온 직원이 주시하는 가운데 직장생활을 이어 나갔다. 소송까지 검토하던 산업은행은 결혼퇴직각서가 법적 효력이 없는 걸 알고 소송을 포기했다. 노미숙씨는 <한겨레>에 “결혼퇴직각서를 불합리하다고 말해놓고 내가 힘들다고 그만두는 비양심적 행위를 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같은 해 10월 노동청은 은행에 결혼퇴직각서제 폐지를 지시했다.

지난 7월 출간된 책 &lt;평등으로 가는 여정-성차별 벽을 깬 여행원 인권 운동사&gt;. 사진 이주빈 기자
지난 7월 출간된 책 <평등으로 가는 여정-성차별 벽을 깬 여행원 인권 운동사>. 사진 이주빈 기자

이들의 역사는 지난 7월 나온 책 <평등으로 가는 여정-성차별 벽을 깬 여행원 인권 운동사>(나녹)에 기록됐다. 책의 주인공인, 은행 내 성차별을 깨기 위해 싸웠던 장도송(86), 이한순(76), 이필영(77), 노미숙(75), 김광옥(78)씨가 지난 10일 몇 년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장도송씨의 미수(88살)를 축하하기 위해서다. 서울 종로구 한 카페,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장도송씨를 위해 이들은 구석 자리를 잡았다. 기자의 질문은 몇 사람의 큰 목소리를 거쳐야 겨우 전달됐다. “무엇을 위해 싸우셨어요?” “원장님(장도송씨는 1993년 조흥은행 연수원장으로 정년 퇴직했다), 뭘 위해 싸웠어?” “뭐.때.문.에.싸.웠.냐.고!” 장도송씨는 말을 알아듣자마자 잠깐의 고민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올바름을 위해서지.” 장씨를 바라보는 이들은 순간 입을 닫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장도송씨는 1962년 여성 최초로 조흥은행에서 승진 시험을 봤다. “치마 입고도 시험 보나?” 하는 남성 행원들의 말이 들렸지만 그는 못 들은 척했다고 한다. 시험에 합격했지만 그는 7년이 지나도 대리 발령을 받지 못했다. “남자 직원을 어떻게 여자 밑에서 일하게 할 수 있느냐”는 게 인사부 답변이었다. 오랜 싸움을 거쳐 그는 1984년 대한민국 은행 사상 최초의 여성 지점장이 된다. 장도송씨는 이때 받은 축하가 오히려 창피했다고 했다. “입행 25년만에 차장이 된 것은 축하할 일이 아니고 여성 차별의 사례지요.”

결혼 퇴직제가 폐지됐어도 1980년대까지 여성 행원에게 퇴직을 종용하는 특별전담반을 둔 은행도 있었다. 김광옥씨는 지점장에게 “저 결혼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결혼 휴가 후 “저 결혼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연습했다. 여성 행원의 결혼이 비교적 자유로워지자 이번엔 은행들은 ‘임신퇴직’을 종용했다. 남성 직원은 임신한 여성 직원에게 “배가 불러서 어떻게 은행 일을 하냐? 그만둬야지”라며 빈정거렸다. 눈총과 구박은 일상이었다. 불룩한 배를 보이며 일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한일은행에 다니던 김광옥씨는 “미제 코르셋을 차고 나오는 배를 눌러야 했다”고 회고했다.

“여성 후배들이 힘 얻기를 바라는 마음에 엮은 책”

이한순씨는 김광옥씨의 말에 목소리를 높였다. “모든 인간은 차별받으면 안 된다. 누구든 차별받는 사람은 그걸 절대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한순씨는 1974년 조흥은행 노조 여성부장을 맡아 그 뒤로 약 10년 간 여성 행원의 근로조건·임금·후생복지 향상을 위해 일했다. 1984~1988년에는 금융산업노조연맹 상근직 여성부장으로 있으면서 전 금융계 여성을 대변했다. 그는 “은행의 대표적 여성 운동가로 남녀차별의 벽을 없앤 장본인”이라고 평가받는다.

이한순씨는 구술을 모아 책으로 엮게 된 계기가 “여성 후배들이 힘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요즘 여성에게도 그 당시 우리가 겪은 일과 같은 성차별들이 여전히 있지 않나. 더 많은 여성이 이 책을 읽고 ‘그때도 이런 일이 있었구나, 이렇게 극복했구나’ 생각하면서 외롭지 않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도송씨는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 “아직도 그때 노력을 덜 했다고 생각해서 아쉬워.” 장도송씨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이 빛났다.

이주빈 기자 y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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