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주민등록제도가 도입 반세기 만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1962년 박정희 의장이 이끈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주민등록법을 만든 지 52년 만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27일 “주민등록번호를 대신해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대안이 없는지 검토하라”고 말하면서다. 사상 최대인 1억건 이상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의 대응책 차원에서 나온 말이다.
지난해 안전행정부가 ‘주민등록번호 보호 종합대책’을 발표하는 등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정부 대책이 나온 적은 있지만,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주민등록번호 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은 처음이다.
지난 10여년간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태가 거듭되면서 주민등록번호 제도에 대한 신뢰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회사원 정아무개(29)씨와 같은 황당한 일을 겪은 이들이 적지 않다. 정씨는 몇년 전 한 메신저에 새로 가입하려 했는데, 누군가 이미 자신의 주민번호로 가입해 있었다. “아이디·비밀번호를 알아내 로그인해보니,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어왔어요. 누군가 저를 사칭해 메신저에서 다른 사람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는 거죠.”
정씨는 “오싹한 마음”에 메신저에서 탈퇴했지만, 이후 누군가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주민번호를 도용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계속 시달리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씨는 이번 카드사 개인정보 유출 사태에서도 피해자가 됐다. “내 주민번호가 이미 어딘가 유출되어 있다면, 카드 정보랑 묶여서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불안합니다. 주민번호를 바꿀 수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씨 외에도 많은 피해자들은 “신용카드는 없애거나 다시 발급받으면 된다 해도, 노출된 주민번호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하소연하고 있다.
공공·민간 분야를 막론하고 무차별 수집된 주민번호는 생체정보와 다름없다. 주민번호 하나만 있으면 유전자나 지문처럼 개인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정보 전문가들이 “주민번호 폐지 같은 근본적 대책이 나오지 않는 한 정보인권 침해는 계속될 것”이라고 보는 이유다.
특히 정부가 주민번호 대체수단으로 장려해온 ‘아이핀’이나 ‘휴대전화를 통한 본인 인증제’로 대안을 찾아선 안 된다는 지적이 많다. 정부가 2006년 도입한 아이핀은 주민번호 수집을 전제로 한다. 아이핀 발급 업체인 ‘본인확인기관’을 매개로 한다는 차이밖엔 없다. 휴대전화 본인 인증제 역시 통신업체의 주민번호 수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정보인권 운동단체인 ‘진보네트워크센터’의 장여경 정책활동가는 “정부가 주민번호제에는 손대지 않고 민간 신용정보업체·이동통신업체들의 주민번호 수집·축적을 허용하는 건 책임 방기다. 이들이 주민번호 수집으로 다른 이윤을 창출하는 것도 가능하다. 국가가 나서서 ‘빅브러더’를 키우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진보네트워크센터는 28일 성명서를 내어 “아이핀·휴대전화를 이용하자는 정부의 기존 대안은 이미 전세계에 뿌려진 주민번호 문제를 치유하는 게 아니라 대증요법에 그칠 뿐”이라고 비판했다.


문제의 근본 원인은 우리나라의 주민등록제도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우리나라 주민등록제도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강력한 주민감시체계다. 시민사회·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주민등록제도에 국민 기본권 침해 소지가 있다고 꾸준히 지적해왔다.
시민단체 ‘함께하는 시민행동’의 김영홍 정보인권국장은 “나이·등록지역·성별 등 개인정보를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담는 주민등록번호 제도 자체에 정보인권 침해 요소가 있다. 다른 나라에선 개인식별을 위해 해석 가치가 없는 무의미한 번호를 이용한다”고 말했다. 이 단체는 국내에 인터넷 사용이 일상화된 1990년대부터 주민등록번호제의 문제점을 지적해왔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주민번호제도는 종신단일성(평생 하나만 가지며), 불변성(절대 안 바꿔주고), 일신성(한 사람에게 하나의 번호가 부여되고), 통일성(전국에 걸쳐 단일한 기준으로 생산·배분되며), 범용성(거의 모든 일에 사용되는) 등의 특성을 지닌 개인정보 관리 수단으로 자리잡았다. 이 제도가 있는 한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아무리 외쳐도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강력한 감시제도인 주민번호제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8년 ‘주민등록법 시행령’으로 도입됐다. 그해 1월 김신조 청와대 습격사건, 푸에블로호 사건이 발생했다. 또 인혁당·동백림·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과 한-일 국교정상화에 대한 반발 여론 등으로 박정희 정권은 더욱 강력한 국민 감시와 통제를 원했다. 지금처럼 생년월일을 포함한 13자리 숫자를 쓰기 시작한 것은 유신 직후인 1973년부터다.
주민번호제 도입 당시에도 “인간에게 번호를 붙여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해친다”, “개인을 국가 행정편의를 위한 도구처럼 희생시킨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박목월 시인은 주민등록법 개정 논의가 진행되던 1965년 12월 한 신문에 “간첩의 침투를 막기 위한다는 모양인데, 그것이 시민과 국민의 심리적인 면을 어둡게 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만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글을 썼다.
헌법재판소 산하 헌법재판연구원도 지난해 ‘주민등록번호제에 대한 헌법적 쟁점’이란 연구보고서에서 “우리나라 주민번호는 피해의 최소성과 법익의 균형성에 있어서 과도하게 개인의 인격권과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제한해 기본권의 침해에 이르는 것으로 평가된다”고 지적했다. 2011년 포털사이트 네이트 등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고 이후 주민번호를 바꿔달라는 행정 민원·소송이 잇따랐으나 모두 거부됐으며, 관련 헌법소원은 심리가 진행중이다.
진보네트워크센터, 함께하는 시민행동,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시민단체들은 집단행동에 나섰다. 이들은 28일부터 주민번호 변경을 요구하는 시민 민원인단을 모집해 29일부터 각 행정기관에 민원을 넣을 계획이다.
나아가 근본적으로는 주민번호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상희 교수는 “단기적으로는 행정 혼란을 막기 위해 번호 변경 허용 등의 방식으로 개선해야겠지만, 장기적으로는 폐지가 정답이다. 이렇게 하면 국민들에게는 개인정보의 소중함을 부각시켜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국가·기업이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각종 감시체계를 투입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계기를 확보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장여경 활동가도 “개인정보 유출이 누적되면서 이제 피해가 대대손손 이어질 위험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궁극적으로는 국가가 시민에게 번호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개인식별에 대한 강박을 떨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욱 김효실 기자 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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