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이하 사)=오늘은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론을 중심으로 토론해 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대략 네 가지 정도 주제를 갖고 토론을 해볼 생각인데, 첫번째로 한국 민주주의의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지 얘기해 보자.

최장집 교수(이하 최)=한국의 민주화는 ‘운동에 의한 민주화’라는 특징을 갖는다. 밑으로부터 민중이 권위주의 체제를 해체하려고 투쟁한 결과물이라는 데 별로 이견이 없다. 강력한 권위주의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열정과 에너지를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권위주의로부터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성취했다. 민주화는 크게 두 가지 과정을 거친다. 첫째는 권위주의로부터 민주주의로의 이행이다. 격렬한 투쟁과 운동이 중심이 된 단계가 전면에 나타난다. 그 뒤를 잇는 단계는 민주주의의 공고화이다. 실제로 여러 가지 제도를 만들고 그 민주주의를 통해서 사회적 민주화, 경제적 민주화를 이뤄나가는 내용들이 그 안에 포괄된다. 우리나라의 민주화 이행과 공고화의 초기 단계까지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 만한 모델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컨대 러시아의 경우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다음 대선에서 푸틴 대통령이 헌법을 개정할지 아니면, 다음 임기를 다른 사람이 하고, 또다시 출마할 지에 대해 확실치 않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다시 역전돼 권위주의로 퇴행할 가능성, 다시 권위주의로 회귀할 가능성은 적다. 해방 후부터 80년대 중반까지 냉전반공주의 체제 하에서 기득권이 자리잡았고, 그 구조위에서 민주주의가 안착하는 것은 간단치 않은 문제였는데도 민주화운동의 힘이 권위주의 기득세력을 제압했기 때문에 이행에서 공고화에 이르는 과정은 빠르게 전개될 수 있었다. 문제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공고화의 단계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내용적으로 퇴행했다는 사실이다. 민주화의 에너지와 열망, 거대한 변화의 욕구가 사회적·경제적·문화적·도덕적 영역에 충격을 주고, 그것이 뒷받침돼서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었어야 했는데,?공고화가?그런?내용을 갖지 못했다. 때문에 나는 한국민주주의의 공고화 단계는 성공적으로 완결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은 민주주의가 퇴영적으로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 사회경제적, 윤리적 측면에서 민주주의가 피폐화되고 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건강함과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까에 대해 어두운 느낌을 갖게 된다. 무엇이 공고화 과정에서 이런 문제를 만들었을까. 민주정부들이 기대한 만큼 성과를 이뤄내지 못한 결과이다. 민주주의를 실제로 작동시키고, 사회적인 요구들이나 사회 갈등이나 균열 등을 정책으로 전환해서 사회를 개선하는 데는 정당이라는 메카니즘이 굉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정당의 공고화 없는 민주주의의 공고화, 직설적으로 얘기하면 정당없는 민주주의이다. 이것이 사태를 퇴행적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민주정부들이 정당을 건설하고 발전시키는 데 최선을 다했다면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민주화운동 세력들이 그 에너지, 그 당시에 희망하고 갈망했던 것을 정치의 방법으로 결집해 우리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지 못했다.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조직화하고 실현하는 과정에서 갭이 너무 커서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문제가 퇴영적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민주주의가 됐다고 그 자체로 만족할 만한 결과를 보장해주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가 실제 작동하고 그 내용이 뭔가에 따라 그 결과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민주주의도 하나의 통치체제이기 때문에, 다른 체제가 그렇듯이 퇴행할 가능성이 많다.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상당히 심각한 정치적·도덕적·사회적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상황이 나쁘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김호기 교수(이하 김)=전체적으로 말씀에 동의한다. 같은 맥락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민주화의 아이러니’ 같은 것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국민들의 시각을 지켜보면, 87년 이후 민주화 20년이 되니 민주화가 마감되거나 지나가는 것 아닌가, 산업화 시대 30년이 지난 뒤 민주화 시대 20년 역시 마감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민주화 시대가 마감하는 현재,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고 형평성을 강화하는, 시장의 폭력에 맞서는 민주주의의 공공성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화 시대가 지나가고 있는데 민주주의의 과제는 더욱 중요해지는 아이러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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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각에서 지난 20년을 지켜보면,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로 보고 싶다. 민주주의를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경제적 민주화로 나눠본다면 두 영역 모두에서 성공과 실패가 동시에 발견된다. 정치적 민주화에서는 어느 정도 절차가 제도화되고, 정치자금 문제를 포함해서 깨끗한 정치가 실현된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정치사회와 시민사회는 여전히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비조응 상태다. 시민사회는 보수·중도·진보가 균형을 이루는 반면에 정치사회에서는 보수 대 중도의 2강, 진보의 1약 구도가 나타나고 있다. 더불어 정당정치가 제도적으로 안정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합집산을 되풀이하는 문제도 노정해 왔다. 민주주의의 핵심이 정당정치의 제도화라고 보면, 이런 점에서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사회·경제적 민주화 역시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를 이루었다. 먼저 사회적 민주화에서는 국가인권위 설치, 과거사 규명, 호주제 폐지를 포함한 양성평등 등으로 대표되는 의미 있는 성취가 있었다. 하지만 경제적 민주화의 성적표는 상당히 초라하다. 김대중 정부 이후 적극적으로 채택한 신자유주의 드라이브는 사회적 양극화를 강화시켰고, 중간층이나 노동자계급의 삶의 질을 하락시켜 결국 민주주의의 경제적 지반을 침식시켰다. 민주화가 공고화되는 과정에서 공공성과 형평성이 강화돼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악화되는, 경제적 민주화의 실패는 한국 민주주의의 그늘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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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구 교수(이하 정)=겉으로 드러난 것을 보면 절차적 민주주의는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인권과 자유의 측면에서는 상당히 진전된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 와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악화되고 있는데, 민주주의를 지속시키려면 사회적 기반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 기반이 취약하다. 87년 이후 지역주의에 기대어 민주주의의 한 부분을 지탱하는 것은 취약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속에서 민주주의의 방향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가 중요한데, 민주정부가 이를 전면 수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음으로써 이게 민주주의인가 혼란을 주는 상황이 됐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를 추진하는 정당문제는 여전히 취약하다. 민주정부가 등장했는데 이 정부가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혼선이 생긴 상황이다. 민주주의가 일종의 헤게모니가 되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의 발전 방향이 아니라 과거 일이고,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느냐며 희화화하는 상황이다. 불안불안하게 민주주의를 끌어왔지만, 당면한 문제는 이 민주주의가 지속 가능하냐는 것이다. 올해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주의가 지속 가능할 것인가, 아니면 보수화될 것인가 하는 게 지금 상황이다.

사=중요 대목을 다 짚었는데, 정치적 민주화는 상당한 진전과 성과가 있었다는 게 공통의 평가인 것 같다. 그러나 사회경제적인 민주화는 신자유주의 이후 퇴보 내지 정체라는 평가가 많다. 민주주의 20년의 공과에 대한 평가라는 측면에서 사회경제적 민주화에 대한 평가를 구체적으로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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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리사회에서 경제적 민주화가 지체된 분기점으로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의 초기 정책이 대단히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최 교수가 김대중 정부에서 정책기획위원장을 맡으시면서 민주적 시장경제론을 제창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주장한 셈인데, 시장이 갖고 있는 효율성을 제고하되 시장에 내재된 자기 파괴적 동학, 다시 말해 불평등의 강화를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제어하자는 아이디어였다. 국가와 시장 사이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재벌개혁과 노동개혁을 통해 고삐 풀린 시장의 자기파괴적 속성을 제어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제시됐는데, 결과적으로 김대중 정부가 국가부도 위기는 비교적 빨리 벗어났지만 결국 시장의 민주적 감독과 제어는 실패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소수 재벌의 영향력은 오히려 강화됐고,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98년에 출범한 노사정위원회도 처음에 잘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좌절함으로써 시장의 전일적인 지배 아래 우리 사회가 놓이게 되지 않았나, 이 실패가 노무현 정부까지 이어져온 것 아닌가, 이것이 사회 양극화의 확대를 강화해 오지 않았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김대중 정부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과 일자리 창출을 통해 복지를 강화하는 생산적 복지 등의 사회정책을 추진했지만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과도하게 기울어지면서 결국 경제적 민주화는 달성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최=절차적·실질적 민주화에 대해 좀 더 언급하고 싶다. 그동안은 민주주의의 내용적 측면 혹은 경제적 민주화 중심으로 실질적 민주화를 많이 강조해왔는데, 혹자는 나를 맥시멀리스트라고 할까, 최대강령적 민주주의 또는 최대정의적 민주주의론자라고 비판하곤 한다. 다시말해 절차적 민주주의보다 실질적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것으로 나를 이해하는 경우들을 많이 본다. 내가 글을 통해 실질적 민주화라는 말을 써서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난 20년 동안 민주주의를 경험하면서 내가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초점도 변해왔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이 시점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절차적 민주주의이다. 한마디로 ‘민주주의는 절차적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를 잘못 나눌 때, 현상을 잘못 이해할 때 절차적 민주화는 잘 됐는데 실질적 민주화는 안됐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나 절차적 민주화는 되었으니 이제 실질적 민주화를 하자는 식의 비현실적 단계론이 성행하게 된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낮은 단계의 민주주의이고 이것이 일단락되거나 완성된 다음에 실질적 민주화가 진행된다는 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나는 이런 오해와 혼란을 피하고 싶다. 20년 동안 절차적 민주화가 끝나고 이제 실질적 민주주의로 넘어간다는 생각, 민주주의 이행, 공고화를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로 짝지어 구분하는 것에 대해 나는 생각을 달리 한다. 다시 강조하건대 민주주의 핵심은 절차적 민주주의에서 발생한다. 정치적 수준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회 수준으로 확산되는데 지금 우리는 정치적 수준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정치적 민주화가 사회민주화, 경제민주화를 가져올 수 있어야 한다. 이를 ‘민주주의의 사회화’라고 말하고 싶다. 민주주의가 확산돼 나가면서 사회 자체가 변하고, 사회경제적 시민권이 확대되는데, 또 역으로 이것이 기반이 돼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다시 강화, 확대되는 것이다.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의 평등은 이루어지고 있나? 시민들이 정당이나 이익집단과 같이 자율적 결사체를 만드는데, 시민이 집단을 형성하고 그들의 의사를 표현하는데 제한은 없나? 정치적 이슈나 정책사안으로 제시된 문제들에 대해 시민들이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해서 투표할 수 있도록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고 있나? 정부나 정치엘리트들, 사회엘리트들이 제시하는 정치적 사안에 한정되지 않고 시민들 스스로가 더 좋은 대안을 제시하고 실현할 통로는 열려 있나? 등은 모두 절차적 민주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문제들이다. 현재 우리의 민주주의에서 이런 요건들이 충족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지금은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 낮은 단계, 낮은 수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차적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지 못해서 내용적인 민주주의의 문제가 발생한다. 정당의 문제도 그런 입장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믿는다. 국제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 문제는 이렇게 본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자체가 한국사회의 양극화 문제를 만들고 사회경제적 문제를 악화시킨다고는 보지 않는다. 오늘날 세계에서 신자유주의는 경제에 대한 보편적 가치이자 원리로, 독트린으로, 즉 헤게모니로 군림하고 있다. 마치 50~60년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보편적 질서를 만든 것처럼 70년대 중반 이후 보편적인 현상이 됐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의 실제 내용은 나라마다 다르게 나타났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때문에 양극화·빈부격차·중산층 해체가 나타났다기보다는, 그것에 정치가 어떻게 대응했느냐하는 따라 다른 결과들이 나타났다. 유럽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유럽도 7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았는데, 각국이 대응한 방식은 다르다. 공통적인 것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상당히 수용하고, 노동시장 유연화도 시행하고, 정규직·비정규직 같은 구분도 존재하지만, 정치가 어떻게 작용했느냐에 따라 이것들에 대응하는 방식이 달랐고, 시장개방과 시장가치가 강화되는데 비례해서 사회보장이나 시민권 강화, 노동을 보호하는 사회보장적 장치들이 병행해서 강화됐다. 프랑스에서는 1999년 시라크 보수당 정부시기 레오넬 조스팽 총리 임기 중에 일반 의료보험체계가 전국민의 99%까지 커버하게 됐다. 가난한 사람까지 거의 전부 사회복지 혜택을 준 것이다. 미국은 의료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사람들의 비율이 15.9%나 된다. 정치가 신자유주의에 대응하기에 따라 결과가 이렇게 다르다. 신자유주의를 수용했다고 해서 시장일방주의가 나타나는 게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다. 정치가 어떻게 대응하고 대안을 만드느냐가 중요하다.

김=지난 번 진보논쟁에서 조희연 교수는 사회운동을 좀 더 급진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손호철 교수는 신자유주의 반대 연대를 구축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 둘 모두 다소 일면적인 주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 문제를 분석하는 데 나는 구조적 강제, 경로의존성, 전략적 선택의 세 가지 문제틀이 중요하다고 본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충격이라는 구조적 강제, 우리 현대사에 내재된 냉전분단체제의 형성과 해체라는 경로의존성을 고려할 때, 이런 구조적 강제와 경로의존성 속에서 한국 민주주의는 전략적 선택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전략적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 민주화는 신자유주의의 일방적 강제에 의해 이뤄진 것도 아니고 경로의존성을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구조적 강제, 경로의존성, 전략적 선택의 상호작용을 고려하면, 조 교수는 전략적 선택으로서의 사회운동의 역할을, 손 교수는 구조적 강제로서의 신자유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행위와 정책의 선택은 일종의 구조와 전략의 변증법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변증적 상호작용 속에서 우리 민주화를 독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구조적 강제, 냉전분단체제의 해체라는 경로의존성 속에서 민주정부로서 과연 최선의 전략적 선택을 했냐는 점에서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발전국가 모델을 국가와 시장 간의 생산적 균형 모델로 이동했어야 하고, 사회 양극화 해소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정책을 강구했어야 했는데, 두 정부 모두 미흡하게 해서 그 결과가 오늘날 여러 경제·사회 문제들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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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자유주의 정치 대응 얘기했는데 한국의 민주정당이나 민주정부는 대응에 있어서 왜 급진적으로 신자유주의를 수용했나,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제가 볼 때는 민주화 운동은 직선제 등 자유주의적 목표를 내세웠으나 그 안에 상당히 진보적인 요소가 있어 연결되어 추진됐던 것이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새롭게 등장했던 중도개혁의 성향의 민주정당이나 정부가 진보적 요소를 너무 약화시키고, 안 받아들인 게 아닌가 한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대안을 갖지 못하게 되면서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는 쪽으로 급속하게 경도됐다. 민주정부 안에서 진보적 요소는 주변화되고, 민주노동당 등도 민주정부의 핵심이 못되니까 강해도 주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서) 민주정부가 오히려 보수적 헤게모니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국민의 정부는 햇볕정책을 전향적으로 받아들이고 대처하면서 평화문제에 대해서는 헤게모니를 갖고 있었지만 경제는 대안을 만들지 못하고 신자유주의를 수용해 보수로 갔다. 평화가 경제가 이렇게 대조적이다. 민주정부의 정체성 자체가 분열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사=(최 교수를 보면서) 김대중 정부에서 정책기획위원장을 맡은 바 있으니 그 부분을 말씀해 달라.

최=개인적 경험에 관한 것인데, 그때는 김대중 정부의 성립이 외환위기가 던져준 충격의 결과일 수도 있고, 그걸 극복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던 시기다. 나는 민주적 시장경제, 즉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고 했을 때 어떻게 하면 신자유주의적 충격을 민주적 방법으로 완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병행해서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에 민주주의의 가치, 즉 노동과 사회복지의 원리가 가미된 사회경제적 시민권의 가치를 결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라 하겠는데, 그런 측면에서 정책 진단이나 대안을 고민했다. 결과적으로 볼 때 나 자신의 노력은 별 효과가 없었다. 전체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대응하는 방법은 이미 아이엠에프 또는 워싱턴 콘센서스에 의해서 외부로부터 개혁 패키지가 부과되고, 정부나 정치는 이 과정에서 독립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사회적 내용은 세계화의 충격효과를 완화하는 관점에서 보면 전혀 실현됐다고 말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수용 여부를 둘러싼 선택이 이슈화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한국과 같은 상황에서 신자유주의를 전면적으로 거부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어떻게 정치적으로 대응하고 대안을 마련해서 이 부작용을 통제하느냐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 보는데, 이 문제에서 민주주의가 별 역할을 못했다. 김대중 정부냐 노무현 정부냐 하는 개별 정권 차원을 떠나, 민주화 이후 한국의 정당체제가 보통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삶의 문제를 다루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대안을 만들지 못했다. 사회경제적 이슈에 관한 한 정당간에 차이가 없고 제 역할을 하지도 못했다.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의 잘잘못을 이야기하기 전에 두 정부 모두 정당을 발전시키는 데 관심이 없었고 기여하지도 않았다. 그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기 어렵다. 정당이 사회적 기반을 갖지 않는 정치가 됐다. 우리나라는 대통령 중심제로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대통령이 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과 권위를 갖고 있는데, 대통령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과 결정들이, 사회로부터 나오는 여러 가지 요구들과 문제를 정당을 통해 수렴되고, 만들어지는 구조가 아니라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정책 결정자들과 기술관료들이 결정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왔다. 이런 점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그에 걸맞는 사회경제적 내용을 갖지 못하고 외부로부터 부과된 것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양상이 나타났고, 결과적으로 세계 어떤 나라보다도 급진적인 성장지상주의 경제정책이 나오게 됐다. 적어도 경제정책의 중심기조는 권위주의 정권으로부터 민주정부까지 변하지 않았다. 모든 경제적·사회적 자원이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동원되는 구조에서는 다른 가치들, 예를 들면 분배의 정의, 사회정의, 시민권 등이 자리잡을 여지가 적다. 개별 정부의 공과는 정책수행에 대한 평가를 통해서 주로 얘기되는데, 기왕에 얘기를 한다면 한국에서 대통령은 무슨 역할을 하는가, 민주주의 하에서 대통령직을 어떻게 규정하고 어떤 역할을 하기를 바라고, 제도적으로 어떻게 권력이 행사되고 제한될 수 있느냐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동안 정치적 내용 측면의 평가에 초점이 맞춰졌는데,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르면, 정당과 정치인은 국민의 의사를 대표하고, 선출된 정부가 자기를 뽑아준 국민에 대해 책임질 때, 그럼으로써 대표-책임의 ‘고리’를 형성할 때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것이다. 선출된 대표자나 대통령이 자신을 뽑아준 사람들로부터 자율성을 가지고 정책을 결정하고 만들어가기 시작하면, 말하자면 일반 투표자들의 의지와 요구라는 구속을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되면 대표-책임의 연결고리는 유지될 수 없다. 대통령이 민주적 책임성의 원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당인데, 정당이 대통령의 하위도구, 수단으로 기능해왔다. 대통령과 정당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이승만 정부부터 현재까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서구 유럽은 신자유주의에 대응하면서 정부들이 노동보호·사회보장 정책을 취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정당이 확실하게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정부는 이를 기반으로 통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김=노무현 정부의 지난 4년 6개월을 돌아보면, 막스 베버가 말한 ‘심정윤리’와 ‘책임윤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선과 악의 이분법에 따른 ‘심정윤리’와 정치적 행위의 결과까지 고려하는 ‘책임윤리’ 사이의 긴장을 노 정부의 국정운영에서 느끼게 된다. 노무현 정부가 국정목표로 내건 3대 국정 목표는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였다. 먼저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아래로부터 시민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직접 반영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있었고, 대통령 자신도 말했지만 새로운 거버넌스를 구축하려고 했던 문제의식도 좋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우리 정치 현실에서는 다소 성급한 ‘당정분리’를 고수한다거나, 진보개혁 지식사회와 시민에게 충격을 준 대연정을 제안하는 것 등은 여전히 큰 아쉬움을 남긴다. 책임윤리의 관점에서, 노 정부는 자신이 추진한 전략과 정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더욱 적극적으로 고려했어야 했다.

한편 경제에서는 단기 부양책을 쓰지 않은 것이나 장기주의적 관점을 고수하는 것은 바람직했다. 하지만 다른 정책들이 과연 의도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다시 따져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국토균형 발전은 심정윤리로는 옳지만 책임윤리의 관점에서는 지방의 집값, 부동산값 상승을 가져오고 투기를 강화한 측면도 존재한다. 더불어 비정규직, 자영업자 등 경제적 현안에 대한 더욱 사려 깊은 정책들 또한 추진됐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 정부는 수출증가율이나 주식시장의 화려한 지표를 내세우는데, 내수시장의 성장이나 국민소득 증가에서 그 지표의 실제적인 결과는 좋지 않다. 양극화는 강화되고, 균형발전도 현재로서는 만족할 만한 성과를 이루지 못한 상황 아래에서 국민들이 체감하는 경제 및 사회정책의 결과는 일련의 여론조사가 보여주듯이 부정적인 평가가 더 두드러진다.

마지막 대외정책에서는,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를 강조한 동북아 중심론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에서 잘 나타나는 미국 중심의 외교 사이에서 일종의 진자운동이 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략 및 정책의 선택에서 유연성 못지않게 일관성이 중요한 법인데, 과연 국정 목표로 내건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가 얼마나 성취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보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더 우세할지 모르겠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노무현 정부는 탈권위주의, 권력기관 제자리 찾기, 깨끗한 정치 등의 긍정적인 성과도 적지 않지만, 3개 국정목표를 중심으로 보면 그렇게 만족할 만한 성취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4년 반 동안 노무현 정부의 국정운영 지지율은 국민들의 시선과 기준에서 노 정부의 공과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노무현 정부의 반론권이 보장 안 되니 감안해서 말해달라.

정=(웃으며) 반론할 게 별로 없다. 예를 들어 탈권위주의, 인권은 나름대로 진전이 있었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방향은 잘못됐으나 성과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게 앞으로 어찌 나타날 것인지… 한미에프티에이 같이 나중에 나타날 결과가 우려스럽다. 경제 자체 지표는 그런대로 괜찮게 나타나고, 평화의 측면도 국민의 정부만큼 뚜렷하지 않지만 나름대로 진전이 있었다. 한미 에프티에이 수용은 잘못됐다. 민주정부라는 이름은 민간정부라서 붙이는 게 아니다. 민주화의 흐름 속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민주정부라고 하는 것이다. 그 큰 흐름 속에서 민주정부가 신자유주의의 보수적 정책을 채택하는 것은 정부의 정체성과 맞지 않다. 민주정부의 역설이다. 참여정부는 정책보다 정치에서 실패했다. 정책적으로 신자유주의를 급진적으로 수용하면서 자기 지지기반의 해체를 가져왔다. 지역주의 문제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아는데 그걸 극복하는 문제에 있어 너무 급진적으로 접근했다. 지역주의가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지만, 호남 지역주의는 한국 민주주의를 지키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역주의를 민주적 기반이 되는 쪽으로 전환시켜야 하는데 급진적으로 해체하려고 시도하다 실패하고 만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기 지지기반을 해체시키고 지역주의 극복 방식에서 민주주의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절차를 밟는 데 실패했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의 정치적 어려움이 비롯된 것이다.

사=일반조사에서는 경제정책이나 지표에 대한 지지도 낮은데, 정 교수는 경제지표와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보충 설명을 한다면.

정=신자유주의 문제에서 급진적 수용은 반대하지만 외부의 압력은 강하다. 어떤 면에서 장기적으로 보면 개방화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오히려 그 속에서 급진적 수용이 아니라 점진적 개방화랄까, 덜 급진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내부로부터 부작용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 되고 있다. 부작용은 미래에 나타날 것이다. 현재 지표로 봤을 때는, 실업과 일자리 문제는 심각하다.

김=앞서 저도 노무현 정부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시각에서 말씀드렸는데 후학들이 갖고 있는 궁금함 중에 하나는 노 정부에 대한 최 교수님의 비판이다. 객관적으로 노 정부의 실정 내지 부정적인 측면이 작지 않다. 하지만 그 결과가 부정적이라 하더라도 의도는 선한 것이지 않았나, 잘 해보려고 했는데 세계화를 포함한 구조적 조건이나 우리 정치·시민사회의 특성 때문에 좋은 결실을 맺지 못한 측면도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제가 보기에는 다소 과도할 정도로 냉정하게 비판하는 면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진보 논쟁 와중에 대통령이 논쟁에 개입한 일도 있었고 해서 여쭤보는 것이다.

최=내용적인 면에서 노무현 정부의 정책 내용과 결과를 보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충격을 완화하는데 관심을 가졌다기보다, 이를 보다 급진적으로 추구하는 정책을 폈다고 하겠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사회양극화, 빈부격차, 중산층 해체를 심화시켰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적이냐 아니냐하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세계 전체의 일반적인 방향이고, 어떻게 보면 시대정신 비슷한 면이 있기 때문에 이것 자체를 왜 택했냐든가 택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은 현실성이 적은 것으로 보인다. 나는 문제가 신자유주의냐 아니냐에 있다기보다, 노무현 정부가 개혁적이라고 자임하고 거기에 동의하는 사람도 많은데 그러한 레토릭이나 주장과 달리 왜 정부는 기존의 상층편향적 수혜구조나 기득권 구조를 변화시키지 않고 타협했느냐 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차원 혹은 제도적 차원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부의 책임성, 대통령직의 역할, 정책의 내용 등에서 노무현정부가 개혁적이라는 평가에 동의하기 어렵다. 경제정책의 내용을 떠나 정치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면, 노무현 정부가 정치를 비속화 혹은 저속화한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노무현 정부의 리더십과 관련해 탈권위를 통해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강조하는데, 권위와 권위주의, 탈권위와 탈권위주의는 전혀 동일하지 않다. 민주주의는 좋은 권위를 필요로 한다. 막스 베버도 ‘지도자 없는 민주주의’가 갖는 문제점을 강조한 바 있다. 우리의 관심은 일상에서의 권위가 있느냐 없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문제를 말하는 것으로 대통령직이 가져야 할 민주적 권위가 저속화되었다는 것이다. 또 문제를 선악으로 구분해서 보고, 정서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동원하고, 불필요하게 사회에 갈등과 대립을 불러왔다. 정치적 어젠다를 여러가지 정치적 방법, 정부의 정책을 통해서 설정하는 게 아니라 비판자에 대해 감정적인 공격을 동원하는 방법을 통해 정치적 이슈가 제기됐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는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할 수 없다. 집권세력 안에서도 내부비판이 가능하지 않은 환경이 만들어졌고, 이러한 분위기는 반지성주의, 반이성주의 풍조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다. 나 스스로는 노무현 정부 자체에 대해 특별히 감정적인 면에서 부정적으로 편향돼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통령 개인에 대한 문제보다도 노무현 정부를 통해 드러나는 한국의 대통령직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다. 국가가 개혁의 중심이 될 때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그렇게 작동되지 않을 때 국가는 권력의 체현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럴 때 국가권력은 시민권력, 민주주의에 의해 비판되고 통제되어야 한다. 대통령은 선출된 뒤에도 자신을 선출해준 지지자들, 넓게는 국민들에 대해 정치적 책임뿐만 아니라 개인적 수준에서 사회와 국민에 대해 윤리적 책임을 지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리이다. 그 다음 하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노무현 정부 들어와서 많은 비판적 지식인들이 국가권력에 광범하게 참여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것이 지식인들로 하여금 권력과 비판적 거리를 갖기 어렵게 만들었다. 권력이 민주적으로 선출되었다고 해서 민주적으로 작동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은 항상 비판의 대상이 돼야 하고, 시민사회는 이런 역량을 가져야 한다. 권력행사가 언제나 민주주의의 원리와 규범에 따르는 것이냐, 정책이 바람직한 것이냐에 대해 지식인이 비판적 역할을 해야 정권도 민주주의도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정부 들어와서는 이런 현상이 현저하게 적어졌다. 지식인의 비판적 역할이 사라졌다. 이것이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활력있게 만들지 못하는 데 중요한 요인인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보면 시장 가치가 도덕이요 규범이 된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졌는데, 그게 정치의 한 측면이나 영향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볼 수는 없다. 정치지도자의 역할은 사회를 윤리적으로 만드는데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믿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민주화 이후 대통령들이 대통령으로서 윤리적인 모습을 보였느냐 하는 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노무현 정부에 들어와서 나타난 현상으로, 정부의 집권자들과 지지자들은 ‘이 정부는 민주적으로 선출됐다’ ‘이 정부는 개혁적이다’ ‘이 정부는 도덕적으로 깨끗하다’ 라는 생각을 갖는 듯하다. 이 정부의 핵심 지지자들은, 이 정부가 기대한 방향으로 가지 않고 궤도를 상당부분 벗어날 때에도 무비판적으로 함께 갔다. 그러는 동안 누군가가 이 정부에 대해 비판을 하면 ‘보수언론과 뭐가 다르냐’는 식의 반응이 따르고, 이러한 생각은 사태가 희망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에 대해 책임을 외부화하면서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고, 적을 만들고, 이런 방법으로 정치를 불필요하게 도덕적으로 규정하고 아와 적으로 구분하면서 감정적으로 대응하게 하는 분위기가 만들었다. 이성이나 지성을 통해 정치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대화, 그런 환경이 나빠지거나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나로서는 특별히 정책적인 결과를 하나하나 비판하기보다는 정치적인 측면과 사회윤리적인 측면에서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사=노 대통령이 토론을 즐기는데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가 있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런 연장선에서 대통령이 지식인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얘기를 했는데 일반 독자들도 궁금해 한다. 노 정부에 대한 정치 공과 평가할 때 부정적 측면이 있는 반면, 김대중 정부와 비교할 때는 깨끗한 정치라는 면에서 나아지지 않았나. 김대중 정부의 보스정치라는 측면에서 보면 정당정치의 원리에 비추어 나아진 것 아니냐는 시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최=성과를 이룬 부분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나의 비판의 초점은 잘못된 방향선택이 가져온 부정적 결과들, 그리고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부작위’적인 내용에 대한 것이다.

사=정당정치에서는 노무현 정부가 김대중 정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낫다고 보는 것 같은데, 노 대통령은 정당정치를 퇴보시켰다는 교수님 지적에 대해 ‘제대로 평가를 못 받았다’는 입장이다. 최 교수가 김대중 정부에 몸 담아서 그런지 노무현 정부를 강하게 비판한다는 얘기가 노무현 정부쪽에서 나오는데.

최=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정치적 상황이랄까, 환경은 다르다고 본다. 물론 그 이전, 87년 민주화부터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으로 오면서 계속해서 정치적 환경은 많이 달라졌다. 김대중 정부만 해도 구 권위주의 세력으로부터 처음 정권을 교체하게 되면서 많은 제약들이 있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이보다 좋은 상황이 만들어졌다. 김대중 정부는 ‘여소야대’라고 하는 구체적인 제약이 있었지만, 노무현 정부는 구질서와 구세대가 일단락되고 386이라는 본격적인 민주화운동 세력의 다수지지로 성립됐다. 2004년에는, 우연이지만 탄핵의 결과로 민주화 이후 첫번째로 여소야대가 아닌 상황을 맞기도 했다. 말하자면 행정부와 의회 다수를 가지게 된 것인데, 역사적으로 볼 때 이렇게 좋은 개혁적 환경을 향유했던 지도자는 없었다. 제약조건은 약화된 반면, 할 수 있는 조건은 열려 있었는데 노 대통령이 탄핵에서 돌아와 취한 태도는 개혁과 멀었다. 나는 탄핵으로부터 돌아온 대통령이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 일정하게 부응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대통령의 선택은 기대와 너무 달랐다. 이 좋은 환경을 무산시키고 있을 때 허무하다고 할까? 보통사람들이 민주주의를 통해서 사회발전 등 그 효능을 경험할 때 민주주의가 강화되는 것인데, 기대와 달리 결과가 나쁘게 나타날 때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불신하며, 냉소하게 된다. 그런 것이 상대적으로 강해지고 팽만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노무현 정부는 환경을 갖추고도 스스로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망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김=이 대목에서 알튀세르가 말한 바 있는 이론의 효과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연구자가 어떤 이론을 주장했을 때 그것이 미치는 정치적 효과를 고려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비판이 학문적으로는 당연하다. 지식인에게 권력비판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비판이 정치적으로는 다른 세력에게 유리한 효과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지 않은가라는 점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일종의 이론과 분석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특히 사회과학의 경우 이 이슈는 간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진리를 탐구하는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물론 그것이 미치는 결과까지 고려해서 자신의 논리를 제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과도한 비판이 보수 세력이 개혁 세력을 비판하는 데 결과적으로 이용되는, 의도하는 않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지적도 있는 것 같다.

사=(최 교수를 향해) 전에 말씀한 ‘정권교체 불가피’론 때문에 진보개혁 진영 쪽에서 얘기들이 많은데 한 말씀 하신다면.

최=여러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한 마디로 정당이 선거에서 패배할 수 있는 게 민주주의다. 경쟁의 결과가 불확실해야 민주주의가 작동되는 것이다. 경쟁의 결과가 언제나 예상가능할 때 민주주의는 역동성을 상실하게 된다. 만년 야당과 만년 여당이 항상적으로 그렇게 고정화되어 있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원리로 볼 때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한국의 민주화 20년은 짧은 경험의 시기이고, 경험이 생생하니까 민주화 세력이 공유하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상정하는데 그것은 허상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시점에서 민주화 세력이라는 말에 하나의 집단적인 동질성을 갖는 어떤 정치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386 운동세력은 우리 사회의 보수나 진보, 청와대·국정원·여당·한나라당, 뉴레프트· 뉴라이트, 안 들어가 있는 데가 없고 또 거기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민주화 운동은 시대적으로 볼 때 역사적 역할이 끝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운동의 역할이 끝났고, 운동세력이 해체됐다는 이 말을, 민주화운동의 정신과 유산, 전통과 의제들이 의미가 없어졌다는 말과 혼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민주주의 제도가 작동하는데 따라 어떻게 ‘좋은 민주주의’를 만들어갈지 생각하는 시기가 됐다. ‘범여권’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는데, 이것의 기본 가정은 야당에게는 권력을 주지 않겠다, 한나라당에게는 못내준다, 이런 것인데, 오늘의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을 보면서 개혁이냐 수구냐 하는 식으로 갈등축을 긋는 것이 아직도 유효하냐 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이런 식으로 경쟁축을 만들 때 그것이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더 이상 그런 질문이 유효할 수 없기 때문에 후보단일화나 대통합이라는 말이 내게는 의미있게 와닿지 않는다. 후보단일화나 대통합을 말할 때 중요한 것은 그 성격과 내용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지도 않고 야당은 안 된다는 것은 기존의 권력구조를 고착화하고 이것을 그냥 관성적으로 되풀이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것 밖에는 안 된다. 현재의 범여권 담론이나 대통합 주장은 도덕적 선과 악의 기준에 의존하는 바 크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정부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 ‘수구세력은 나쁘다’, ‘개혁은 좋다’, ‘우리만이 개혁의 담지자다’라고 하면서, 여기서 보수언론을 적으로 설정하고 그것에 반대하는 정서를 동원하고 적대시하는 구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문제를 도덕적 선악으로 판단하는 방식의 결과물이다. 기존의 민주세력을 자임하고 대표하는 정부의 정책 수행과 리더십에 대해 투표자들이 표를 통해 평가한 결과를 수용해야 한다고 본다. 한나라당이 돼야 한다, 이런 것은 아니다.

김=전적으로 동감한다.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시공간이 크게 변화됐다. 민주화 못지않게 세계화가 우리사회에 지대한 영향 미치고 있다. 민주화 세력도, 진보개혁세력이란 표현을 쓰지만, 훨씬 다원화됐다. 범여권 일각에서 ‘민주개혁평화미래세력의 총집결’ 등과 같은 표현을 여전히 많이 쓰고 있는데 무엇을 공통분모로 해서 집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한미 FTA에 대해서 어떤 동일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비정규직에 대해서 어떤 공통된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지 회의스럽다. 총집결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취약한데, 막연하게 보수 세력에 반대한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모여야 한다면 이런 주장은 사실 공허하다. 철지난 유행가가 아닌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이론을 비판할 때 내부 논리를 비판하는 ‘내재적 비판’과 외부 시각에서 비판하는 ‘외재적 비판’의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내재적 비판의 시각에서 최 선생님의 민주화론은 비판하기 쉽지 않다. 정당정치의 정상화라는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 제시에는 저 역시 전적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외재적 비판의 측면에서 보면 최 선생님의 민주화론에는 세계화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이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개정판에 보니까 신자유주의 민주주의에 대한 분석을 하고 계신데, 그 취약점을 선생님도 자각하고 있으신 것으로 보인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민주화와 세계화는 사뭇 다른 사회 조정 원리이다. 민주화가 가치 판단 개념이라면, 세계화는 사실 판단 개념에 가깝고, 경우에 따라서는 반(反)민주화의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기에 개혁 세력과 진보 세력을 모두 포괄하는 민주화 세력은 세계화 시대라는 패러다임을 선뜻 승인하기 어려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것을 언제까지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무엇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우리사회 구조가 전면적으로 재편되고 있으며, 그 과정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이 갈수록 커지는 것을 더 이상 외면하기도 어렵다. 요컨대, 세계화의 충격에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대해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패러다임을 넘어서서 세계화 시대의 지속가능한 민주주의 패러다임이 새롭게 요청되고 있으며, 나는 그 새로운 패러다임과 시대정신이 사회통합적 세계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한 구체적인 현실을 지켜보면, 예를 들어 주식시장의 45%를 외국자본이 점하고 있고, 870만에 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45만 외국인 노동자가 있다. 청년실업문제로 대표되는, 정보화가 가져온 고용없는 성장 문제도 있다. 더불어 세계화의 충격은 한편으로 민족주의보다 협애한 애국주의를 강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시장적 또는 소비적 개인주의를 확산시키고 있다. 세계화의 충격에 대해서 한국 민주주의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 선생님 이론의 합리적 핵심은 보존하되 이제는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해 본다.

최=민주주의를 통해서 이 사회의 정치·사회·경제 문제를 다 해결할수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정치 영역에서 이런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민주주의의 공간을 생각해볼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메커니즘에서는 정당이 핵심이다. 내가 생각하는 정당은 우리가 기존에 경험한 그런 정당이 아니라 민주적인 가치와 제도가 구현된 정당이다. 그런 정당을 통해 일반적인 삶의 문제, 보통 사람들의 생활의 문제를 수렴하고 대안을 조직하고 그걸 가지고 선거 경쟁으로 들어가고, 선거 경쟁의 결과로 다수가 되면 정부가 정책을 만들어 시행하는 것이다. 정치 엘리트의 관심사로부터 주어지는 어젠다가 아니라 사회의 실생활에서 발생하는 실제 문제를 정당이 조직화하는 데서부터 정치가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화 충격은 보통사람들이 가장 고통스럽게 흡수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느냐하는 것이 정치의 출발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된다면, 정당은 우리사회의 실제 문제를 다룰 수 있다. 좋은 정당을 갖지 못한 우리 토양에서 한번에 이런 큰 전환의 계기가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조그만 사례나 부분에서도 이런 형태의 변화가 발생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지금까지 정당은 실제 문제를 대변하지 않고 엘리트정치 수준에서 이합집산하고 대통령 선거 때문에 헤쳐모이는 양상을 보여왔는데, 이는 정당이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한 결과다. 지금 대선을 앞두고 또 사람 중심으로 집단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정치가 전개되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앞으로의 대선이 치러지고, 그 결과로 새 정부가 구성될 때 우리는 그 정부에 대해 얼마나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지난 정부보다 얼마나 나을까. 이런 정부가 누구를 대표하고 뭘 지향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범여권-수구라는 경쟁축이 어떤 말로 불리우든, 투표자들은 선거를 통해 보다 나은 정부가 들어서기를 기대하면서 투표하고 싶어한다. 그런 것을 기대하면서 선거가 정권교체의 전기가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선거가 치러질때, 무엇인가를 만들어낼수 있는 결과를 기대할수 있을까 하는 회의를 갖게된다. 지금의 상황은 합리적인 투표자가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김=우리의 민주화가 미완의 민주주의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보수 세력은 민주화 이후 담론으로 ‘선진화’를 내세운다. 하지만 선진화 담론이 사회적 약자를 얼마나 배려할지, 민주주의를 얼마나 공고히 할 수 있을지, 양극화를 오히려 강화하지는 않을지 우려하게 된다. 선진화는 공동체 자유주의를 사상적 지반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가 생산적으로 결합하면 좋겠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부재한 공동체 자유주의는 공동체에의 배려에 대해서는 시장적 자유주의를 강조하고 자율적 개인에 대해서는 권위주의적 공동체주의를 강조할 가능성이 높은 문제를 안고 있다. 선진화 담론은 어떻게 볼 수 있나. 민주화라는 시대적 담론은 유효한가. 민주화 시대 이후의 새로운 시대정신은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있나. 선진화에 대한 평가와 민주화 이후 새 시대정신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다.

최=선진화담론이라는 언어는 정치지도자든 지식인이든, 우리사회의 엘리트 누군가가 국민들이 나가야 할 방향을 사전에 설정하고 그 목표를 정의해 주는 기능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를 그렇게 이해하도록 해서 이것을 발전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는 인민주권이고, 정치체제의 주체가 보통사람들이라고 할 때, 그럼으로써 보통사람들의 의지와 희망을 표출하고 조직해서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고 권력의 창출이 밑으로부터 나오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선진화담론은 위로부터 목표가 주어지고 가치가 부여되는 대중동원의 담론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담론의 성격은 발전주의적 이데올로기나 담론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성장목표 6%, 7% 달성이라고 하면 사회적인 모든 자원이 그 가치에 동원되고, 다른 담론이나 가치들 즉 사회복지, 노동, 시민권, 분배의 정의 등은 부차적인 위치에 놓이게 됨은 말할 것도 없다. 선진화담론은 발전주의의 한 유형으로 이해된다. 역사를 산업화-민주화-선진화 단계로 구분 짓는 자체도 그렇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그런대로 의미있는 구분이라고 보지만, 선진화는 달성해야 할 또 다른 목표를 위해 대중들이 동원되는 것이니까, 내가 역사와 민주주의를 생각하는 관점과는 다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기술합리적 효율성의 가치를 중심으로한 ‘국책론’ ‘국가운영론’의 한 형태가 아닌가한다. 앞으로 민주화 이후의 담론이 뭐냐는 것에 대해서는, 나 역시 뭐가 되어야한다는 분명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고, 이것이 가져온 여러 사회·문화적 효과에 압도적으로 영향받고 있는데, 나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강조하고 싶다. 신자유주의가 자유주의의 연장선에 있을까? 나는 이 두 가지가 질적으로 종류가 다른 가치라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는 시장 근본주의 내지는 시장 포퓰리즘의 형태이다. 시장의 가치와 아울러 사기업 활동의 자유가 최우선시되고, 개인의 자유나 다른 인간적 가치는 상대적으로 고려되지 않는 이념이 신자유주의라고 이해한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기본적인 도덕적 자율성, 평등사상 등 인간의 가치를 기본에 둔다. 시장은 사회전체를 구성하는 여러 부문들의 한 하위단위인데, 지금은 시장이 전체 사회를 지배하는 구조가 됨으로써 인간적인 다른 가치가 그보다 하위의 지위로 떨어지고 해체되는 구조다. 자유주의와 다원주의는 민주주의 발전과 병행하고 근본적인 토양이 될 수 있지만,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 가치와 얼마나 병행할 수 있느냐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자유주의에 있어 개인주의는 핵심적인 가치이다. 여기에서 내가 자유주의의 가치를 말하는 것은 인간의 개인자유와 권리, 그리고 자발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국가나 사회발전의 방향을 사전에 설정하고 추구하는 프로젝트와는 다른 방식이다.

정=많이 동의한다. 최 교수 책을 읽을 때마다 날카로운 분석이 눈에 띄는데, 그 분석의 결과가 기대에 못미치니까 비관적인 느낌을 많이 준다. 학생들을 가르쳤더니 너무 비관적이다. 제대로 못하면 정권 바뀌어도 좋다고 하면 논리적으로 맞는 얘기지만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선생님의 비판과 현실 사이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과 전망을 다시 만들어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이 정치 과도기인지 민주정치가 약화된 과도기인지 모르겠다. 우리 정치에서 새로운 희망과 대안을 찾아야 한다. 사회통합이나 복지가 새 시대정신 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대안을 제시할 필요있지 않을까 싶다.

최=민주주의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생각해야 하는데,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정당, 사회운동, 이익집단, 시민사회가 조직할 수 있는 여러 자율적인 집단을 통한 정치참여와 정치활동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정당을 가장 강조하는 게 내 입장이다. 운동이 필요 없어서가 아니라 효능면에서 운동은 항상적으로 유지될 수 없고, 과거 민주화운동시기처럼 분명한 목표도 없다. 다룰 수 있는 이슈도 한미에프티에이 반대냐 찬성이냐와 같이 찬반양론으로 구분될 때만 가능하다. 복잡한 이슈는 운동이 다루기 어렵다. 운동은 개인에게 자기헌신을 자나치게 많이 요구한다. 운동의 효능에 대한 한계를 얘기하는 것이다. 이익집단 역시 한계가 크다. 이익집단은 집단의 특수이익을 실현코자하는 집단행동인데, 이것이 우리 사회의 윤리적인 공동의 이익이나 규범을 얼마나 창출할 수 있을까에 의문이 생긴다. 그리고 이익집단은, 특수이익을 조직할 수 있는 자원을 많이 가진 범주와 영역에서 조직되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크고 강한 집단의 이익을 더 잘 대표한다는 특성이 있다. 정당만이 사회적 약자가 조직된 힘으로 자신의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안정적인 메카니즘이라고 생각한다. 세계화를 통해 발생하는 문제들이 굉장히 많은데 우리 정당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 대안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당장 대선 후보군으로 거론되는 이들의 발언들을 볼 때 이런 느낌을 더 강하게 갖는다. 우리 지도자들은 자기 말을 하지 않고, 하는 말도 추상적이고 설득력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을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어떤 말을 할 경우에도 이를 뒷받침할 정당도 없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을 보면, 판에 박힌 얘기를 한다. 마치 퍼포먼스하듯 이미 주어진 담화랄까, 후보들이 특정의 언어를 하도록 돼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말은 사회의 실생활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고, 자기 말도 아니며 언론을 통해 만들어진 지배적인 얘기를 조합해서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최 교수는 <프레시안> 주최 토론회에서 ‘정당체제에서 중간으로부터 왼쪽 부분이 비어 있는데 왜 조직화를 하지 않나’ 이런 말씀을 하신 걸로 안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 시민사회세력이 이 부분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움직임이 있는데, 이번 대선을 정당정치라는 면에서 볼 때 진보개혁세력이 어떻게 임하는 게 좋을지 말씀해 달라. 백낙청 교수가 주장했던 분단체제 문제와 관련해 최 교수의 담론에서는 급 부분이 빠져 있는 것 아닌가.

최=우리나라 정당 체제에서는 센터(중도)도 없는 게 아닌가 싶다. 센터레프트(중도좌파)는 그만 두고라도. 지금은 라이트만 있다.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그 기초 위에 성장제일주의를 선택하겠다는 데 주요 정당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대선 국면에서 시민사회 일부 인사들, 통합신당, 우리당의 정치인들이 나와 기자회견하고 스스로를 ‘중도좌’라고 천명하기도 하는데, 잘 이해되지 않는다. 뭐가 중도좌인지 주요사안에 대해 입장이나 내용 제시가 필요하다. 성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복지, 분배문제, 노동문제, 기존의 생산체제, 성장체제를 뒷받침하는 체제 등 주요사안에 대해, 이를 성장과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에 대해 입장 제시가 있어야 한다. 한미에프티에이, 탈산업화와 관련해 생산체제를 어떤 방향으로 가져가서 고용을 확대하고 중산층 해체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생산체제를 만들 것인지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중소기업을 강화하는 생산체제를 생각하게 되는데, 대기업 배제가 아니라 고용의 절대다수를 흡수하고 있는 중소기업이 너무 열악하고 탈산업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현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대안적 생산체제에서는 중소기업이 그 핵심을 이루어야한다. 중소기업문제는 교육제도, 복지정책의 방향과 직결돼 있다. 정당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이런 문제들을 고려해야 한다. 어떤 후보라도 이 문제를 어떻게 정책과 강령으로 내세울 것인지, 관심을 갖지 않으면 변화가 없을 것이다. 남북한의 분단체제 극복은 점진적인 방법으로 해야 한다. 민족감정이나 이런 것으로는 해결된다고 보지 않는다. 분단체제 형성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갈등이고 국제정치·냉전의 산물이다. 반세기 이상 아주 극단적인 대립구도로 형성돼 있기 때문에 분단체제는 냉정하게 점진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민족감정이나 통일감정을 앞세우는 것은 위험하기조차 하다. 한일관계를 보더라도 독도문제의 경우에서 보듯 민족감정이 앞서게 될 때 사태는 해결되기 어렵다. 그래도 독도문제는 남북문제에 비해 덜 위험하다. 우리는 독도문제에 관심이 많지만 일본사람들 일반은 관심이 적어 이 문제에 대한 양국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대칭적이다. 이게 정치적 문제와 충돌하면 그 결과가 어떤 방향으로 나타날지 예측하기 어렵다. 분단체제를 다루는 문제에 관한 한 장기적으로, 평화중심적으로 대립을 통제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춰나가는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않을까 생각한다. 분단체제는 정치적·외교적 차원에서 이런 냉정한 접근이 요구된다. 내가 생각하는 남북한관계에 대한 관점은 그런 것이다. 이러한 원칙아래 두 개의 국가가 공존하는 단계라든가 평화를 어떻게 제도화할 것이냐 등등 구체적인 문제들은 전문가들이 논의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분단문제를 접근하는데 있어 성급하게 생각해서 분단체제 극복을 통일담론과 직결시킨다든가 하는 방법은 현명하지 않다고 본다.

김=대선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선거에서는 흐름·구도·비전이 중요하다. 이번 대선의 흐름은 민주화 시대에 대한 평가가 기본 흐름으로 보이는데, 그 구도는 아직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보수 세력은 정리가 되고 있는데 중도개혁 세력에서는 아직도 안개 속이다. 구도가 정리되지 않으니까 구도로서 드러날 수 있는 비전의 경쟁 내지 대립도 뚜렷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볼 때 김대중 정부가 초기에 내걸었던 민주적 시장경제가 세계화 시대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국민들의 주요 관심은 성장과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에 있으며, 중도개혁의 입장에서 보면 성장과 민주주의를 어떻게 결합할지가 중요하다. 세계화 시대라는 거시적 흐름 속에서 본다면 보수 세력이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선진화 담론에 맞서는 민주적 시장경제론의 세계화 시대 업그레이드 버전이 요청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끊없이 낙오자를 양산하고 우리 사회를 ‘두 국민 국가’로 분단한다. 지난 10년 민주 정부가 우리 사회에 남긴 최대의 과제는 바로 이 두 국민 국가로의 경향이 강화됐다는 점일 것이다. 이점에서 개혁 세력이 제시해야 할 비전은 낙오자 없는 세계화, 사회통합적 세계화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혁신을 통한 성장 동력의 확충, 양극화 해소를 위한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공고화라는 지속가능한 세계화 비전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이번 선거가 어렵지 않겠나 생각한다. 대선에서는 어떤 구도를 만들고 어떤 비전을 제시하는냐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