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년도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인 2일 우원식 국회의장이 여야에 “10일까지 예산안 처리에 합의해달라”며, 더불어민주당이 지난달 29일 단독으로 본회의에 넘긴 ‘감액 예산안’을 본회의에 상정하지 않았다. 당장의 충돌은 피했지만, 파국은 잠정 보류됐을 뿐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거대 야당은 대통령실·검찰 등의 특수활동비를 전액 삭감하며 힘자랑에 나섰고, 대통령실과 여당은 설득 대신 ‘철회·사과’를 요구하며 맞서는 탓이다. 22대 국회 개원 이후 원 구성 협상 때부터 긴장의 수위를 높여온 여권과 야당의 대결주의가 극단으로 치닫는 모양새다.
우원식 의장은 이날 정오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고심 끝에 오늘 본회의에 예산안을 상정하지 않기로 했다. 정기국회가 끝나는 10일까지 예산안 처리에 합의해주길 여야 정당에 엄중히 요청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지난달 29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정부안 677조4천억원 가운데 예비비 2조4천억원과 검찰·경찰·감사원 등의 특활비 전액을 삭감한 ‘특활비 0원 예산안’을 단독 처리했다. 연말 ‘쪽지 예산’(막판 예산 협상 때 끼워넣는 지역구 예산)까지 포기한 민주당은 이를 국회법상 예산안 처리 시한인 이날 본회의에서 처리하겠다고 별렀다. 하지만 대통령실과 여당이 강력히 반대하는 만큼 우 의장이 ‘초유의 사태’를 막고 10일까지 말미를 줘 추가 협상을 하도록 권한 것이다. 우 의장은 “여야가 그간 합의에 이르지 못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진지하고 성의 있는 논의가 부족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라며 “다수당은 다수당으로서, 여당은 집권당으로서 책임과 도리를 다하는 게 국민에 대한 예의”라고 여야 모두에 쓴소리를 남겼다.
우 의장의 중재에도, 양쪽이 앞으로 8일 동안 합의점을 찾기까지는 난항이 예상된다. 애초 민생 예산을 추가 확보할 ‘협상용 배수진’으로 단독 감액안을 처리한 민주당은 일단 추가 협상을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박찬대 원내대표는 당 의원총회에서 “당정이 민생 예산 증액엔 관심이 없고 특활비 사수에만 관심을 쏟고 있는데 협상 기한을 더 준들 뭐가 달라질까 의문”이라면서도 “정해진 기한 내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검찰 등이 증빙자료를 제출하지 않는 특활비는 한푼도 복원해줄 수 없다는 방침이어서, 여야 간 치열한 힘겨루기가 예상된다.
국민의힘은 아예 ‘감액 예산안 철회와 사과 없이 추가 협상은 없다’는 데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추경호 원내대표는 이날 의원총회를 열어 “민주당이 이렇게 날치기, 일방 강행 처리한 폭거에 대해 사과를 하고 철회하지 않으면 그 어떤 추가적인 입장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우 의장이 제시한 시한인 10일을 두고도 “날짜와 관계없이 민주당의 사과, 철회가 우선이다. 그게 아니면 10일이 아니라 20일이라도 어떤 협상에도 임하지 않는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갈등이 예산을 둘러싼 샅바 싸움을 넘어, 22대 국회 들어 지속되고 있는 ‘장기 교착 상태’의 극단적 양상이라고 입을 모았다. 행정부의 예산편성권을 침범한 거대 야당과 입법부의 예산심의권을 무시한 정부가 정치적 대화도, 기교도 사라진 ‘비토크라시’(상대 정파의 정책과 주장을 모조리 거부해 정부 시스템이 오작동하는 상태)의 무한 반복을 빚고 있다는 것이다. 서복경 더가능연구소 대표는 “원 구성 협상 당시부터 의석수에 따른 규칙을 설정하는 데 실패하면서 인사와 입법, 예산에서까지 ‘데드록’(교착)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정치는 각자의 카드를 주고받는 협상인 만큼, 핵심 의제가 없는 행정부의 문제가 입법부의 교착으로 귀결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런 ‘승자 없는 전쟁’의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있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는 “여당은 수정안을 내놓지 않고, 야당은 정부안을 걷어차는 보복 정치가 이어지고 있다. 타협과 숙의의 공간인 국회가 이런 상황에서는 국민들도 정치적 회의주의와 패배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고경주 기자 goh@hani.co.kr
전광준 기자 ligh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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