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살이녀, 화끈녀, 5억 스폰녀, 통진당 미모녀, 무개념녀, 돌직구녀, 김여사. 최근 포털사이트의 기사 제목 속에 등장한 여자들의 명칭이다. 자극적인 명사 뒤에 ‘녀’를 붙여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기사들은 한국에서 여자들이 ‘누리는’ 지위를 드러낸다.
여기에는 모든 것을 남녀로 나눠야만 직성이 풀리는 놀라운 강박이 담겨 있다. ‘여고생’과 ‘여대생’에서 시작해 ‘여류 소설가’, ‘여배우’, 심지어 ‘여신도’와 ‘여죄수’에 이르기까지, 어떻게든 여자의 성별을 강조해야만 하는 이 언어적 강박은 남자가 표준이자 기준이 된 사회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관습화된 명칭이라 해도 여성이 이루어낸 성취가 유별나거나 대단하게 여겨진다는 것은 그만큼 성적인 구별과 차별이 심하다는 말이다.
조선시대의 여자가 가부장적 억압의 피해자였다면, 우리 시대의 여자들은 사회적 모순의 매개자이다. 대개 ‘○○녀’로 불리는 이들은 보편적 가치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각양각색의 취향을 매개한다. 맘에 들지 않는 취향은 황당함이라는 감각으로 변환되어 ‘○○녀’라는 명칭을 통해 공격성의 배출구로 활용된다. 대중문화 텍스트에서도 마찬가지다. <화차>의 여주인공은 빚으로 운용되는 현 자본주의 비판의 매개로, <돈의 맛>의 필리핀 하녀는 모욕적이지 않은 삶을 위한 매개로, 드라마 <유령>의 여배우와 여고생은 지배층과 학벌주의의 비밀을 드러내는 매개로 나타난다.
<건축학개론>의 첫사랑 여인은 화룡점정이다. 남자에게 그녀는 자신의 순수함을 기만한 ‘썅년’으로 남았다가, 다시 추억과 진실을 부르는 ‘기억의 습작’이 된다. 매개의 역할이 그러하듯, 이 여자들은 자신의 언어를 갖지 못한 채 남자 혹은 남성화된 사회의 자기비판과 성찰을 이끌어내고는 장렬히 전사한다.
‘○○녀’의 유행은 인간의 상품화가 당연시되는 체제의 산물이기도 하다. 상품의 이름이 특징을 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듯, 인간이 상품화된 사회에서는 인간에 대한 호칭 역시 그렇게 변한다. 수없이 많은 상품이 진열된 백화점에서 상품 간의 차이가 사라지듯, 상품으로 변한 인간들에게서도 특이성과 개성은 사라진다. 고만고만한 상품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수적인 것은 화려한 볼거리를 담은 ‘스펙터클’이다(‘스펙’은 ‘스펙터클’의 쌍둥이 형제다). 전통적으로 ‘아름다움’의 가치를 강요당해온 여자는 이러한 체제의 가장 주된 행위자이자 피해자다. 살아남거나 성공하기 위해 여자들은 스스로 스펙터클이 된다. 내레이터 모델, 여자 도우미, 레이싱걸, 치어리더, 배트걸, 기상캐스터 등 거의 모든 곳에서 여자들의 성적 아름다움은 시선을 사로잡아 흥미를 끄는 도구로 쓰인다. 노골적으로 성적인 이미지를 팔면서 동시에 청순함과 귀여움도 구비해야 하는 소위 ‘걸그룹’은 이러한 상품 스펙터클 사회가 가진 분열증적 면모를 전형적으로 드러낸다.
총체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여성의 대상화와 상품화는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 한 대개 용인된다. 생존은 말할 것도 없고 존엄한 삶을 영위할 권리마저도 개인의 책임으로 전환되어버린 사회, 모두가 무한히 도전해야만 하는 전쟁터 같은 사회에서 취약한 여성에 대한 이용과 공격은 갈수록 거세어진다. ‘○○녀’ 현상은 이러한 경향의 가장 대중적인 방식이며, 가볍게 소비되고 만다는 점에서 어쩌면 더 위험한 방식이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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