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정임 |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장
첫아이를 낳았을 때, ‘산후 우울증이 이런 건가’ 생각한 순간이 있었다. 너무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를 품에 안았는데, 이 험한 세상에서 무사히 키울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기자로 일하며 보거나 들었던 교통사고, 실종, 유괴 등 온갖 비극이 칼날처럼 뇌리를 찔렀고, 아기를 안은 손이 떨렸다. 나쁜 일이 생긴다면, 내 삶도 끝날 게 분명해 보였다. 곧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일상에 치여 걱정할 틈이 없어졌고 아이도 무사히 자랐지만, 원초적 공포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지난 15일 한 언론사가 올린 현장 영상에서 절규하는 중년 여성을 봤을 때, 순식간에 감정이입이 되며 가슴이 미어졌다.
“저 어차피 살아도 그만이고, 안 살아도 그만인 사람입니다. 안나 때문에 살았고, 안나 때문에 죽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에, 제 인생의 목표가 이미 없어졌기 때문에….” 눈물이 흥건하게 번진 얼굴로 장연미씨가 말했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문화방송(MBC) 사옥 앞, 오요안나 1주기 추모문화제 자리였다. 장씨의 딸 요안나씨는 꿈꾸던 방송사의 기상캐스터 공채에 뽑혔으나 프리랜서 계약을 해야 했고, 취약한 처지에서 직장 내 괴롭힘에 시달리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고용노동부는 괴롭힘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프리랜서라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않기 때문에’ 법적 조처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살아도 그만이고 안 살아도 그만인’ 어머니는 또 있었다.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2018년 사고로 숨진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였다. 그는 단식농성 중인 장씨를 위로하러 추모제에 나왔다. 하청업체 노동자였던 용균씨는 2인1조로 하게 돼 있는 석탄 컨베이어벨트 점검을 혼자 하다 기계에 끼여 목숨을 잃었다. ‘위험의 외주화’를 위해 하청을 주고, 비용을 아끼려 두명 쓸 자리에 한명만 쓴 기업이 초래한 죽음이었다. 애지중지 키운 외동아들을 잃은 김씨는 투사가 됐다. 비정규직의 산업재해 등을 막겠다며 김용균재단을 만들고, 검게 그을린 얼굴로 노동 현장을 누비고 있다.
평범했던 두 엄마를 거리로 내몬 기업들은 여전히 비정하다. 용균씨가 숨진 태안화력에서는 지난 6월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김충현씨가 또 기계에 끼여 숨졌다. 문제의 선반기계에는 비상정지장치가 있어 누군가 멈출 수 있었지만, 인력 부족으로 김씨 혼자 일하다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법률지원단체들에 따르면 문화방송은 요안나씨의 출퇴근과 업무 등을 엄격히 관리했으면서도, 여전히 ‘사실상 근로자였음’을 부인한다. ‘동료 기상캐스터들이라도 정규직으로 전환해달라’는 장씨의 요구도 외면했다. 장씨는 추모제에서 “정의를 부르짖고 정의를 말하는, 이 훌륭한 문화방송 엠비시에서 … 한 사람마다 다 소중한 우주들인데, 그 우주들을 함부로 버리고, 죽어도 신경 안 쓰고,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해도 되는 거냐”고 울부짖었다.
직장갑질119 대표인 윤지영 변호사는 지난 5월 ‘노동인권 현주소’를 주제로 한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특강에서 “노동법이 적용되면 돈도 많이 들고, 이것저것 지켜야 되는 것들이 많아지니까, 회사들은 어떤 식으로든 일을 시키는 상대방이 노동법에 적용이 안 되게끔 만들려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는 회사의 통제를 받으며 정규직과 다름없이 일하지만, 법적으론 프리랜서, 특수고용, 업무위탁 사업자가 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취약한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은 임금 등 처우에서 차별받고, 언제 일이 끊길지 몰라 불안에 시달리고, 가장 위험한 업무에 내몰려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이재명 정부는 이런 ‘권리 밖 노동자’를 위해 ‘일터 권리보장 기본법’ 등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런 약속도 꼭 지켜져야 하지만, 더 시급한 것은 고용주의 인식 전환이다. 민간기업은 물론 공기업, 언론사, 대학도 사실상 ‘상시적 일자리’까지 비정규직, 프리랜서 등의 값싼 노동으로 메우는 일이 많다. 진실과 정의를 말하는 언론사, 진리와 인권을 가르치는 대학까지 불안정 노동자의 한숨과 고통을 연료로 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직원을 부품처럼 갈아 끼우면 경험과 지식도 축적되지 않는다. 다 같이 신명 나게 일해 생산성이 쑥쑥 오르도록, ‘모든 노동자를 합당하게 대우하는 일터’를 만드는 게 옳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