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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5년 7월4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ne Big Beautiful Bill Act)에 서명하고 있다. 연준 위원들이 고려해야 할 건 관세보다는 이 법의 후폭풍이다. 로이터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5년 7월4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ne Big Beautiful Bill Act)에 서명하고 있다. 연준 위원들이 고려해야 할 건 관세보다는 이 법의 후폭풍이다. 로이터 연합뉴스

장영욱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

 미국의 일방적인 상호관세가 발효된 8월7일, 미국무역대표부(USTR) 제이미슨 그리어 대표가 뉴욕타임스에 의미심장한 칼럼을 실었다. ‘우리가 세계질서를 재편한 이유’라는 제목의 글에는, 세계무역기구(WTO)로 대표되는 무역 질서 아래 미국이 얼마나 큰 불이익을 당했는지 구구절절 적혀 있다. 그리어에 따르면 기존 다자무역체제는 불공정하고,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며, “노동자를 착취하고 정부에서 보조금을 받아” 싸게 물건을 만드는 중국 같은 나라의 배만 불린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동시다발적인 무역협상을 진행해왔으며 이미 놀라운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리어는 이 협상 과정을 “트럼프 라운드”라고 명명했다. 주먹구구식 관세 부과를 세계 무역 질서의 역사적 전환으로 포장한 그의 처세술에 상사가 퍽 흡족해했을 것 같다.

그리어의 칼럼은 기존 세계질서에 대한 미국의 문제의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으나 석연찮은 구석도 많다. 칼럼의 주장과 달리 자유무역은 미국 제조업 일자리 감소의 유일한 이유가 아니다.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 이전에도 미국의 제조업 비중은 줄어들고 있었다. 산업구조 전환은 경제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시장 개방에도 불구하고 고부가가치 첨단 제조업은 여전히 미국에 남아 경제성장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1990년에서 2024년 사이 미국의 제조업 분야 시간당 생산량은 두배 이상 늘었다. 또한 보건, 금융, 정보통신, 교육, 법률 등 서비스산업에서 미국의 경쟁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국제분업 덕분에 미국은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에 집중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내용은 칼럼에 언급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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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은 관세가 ‘생산’이 아닌 ‘소비’에 미치는 영향도 말하지 않는다. 수입관세가 부과되면 필연적으로 물가가 올라간다. 단기적으로 수입품 가격이 오르고, 중장기적으로 싸고 우수한 해외 기업 제품이 비싼 국내 기업 제품으로 대체된다. 일괄적인 전 품목 관세 부과로 원자재와 중간재까지 비싸지면 생산 단가와 물가는 더 오른다. 물가안정을 위해 궁극적으론 국내 기업이 혁신을 통해 가격을 낮춰야 하는데, 무역 장벽의 보호 아래 독점권을 부여받은 기업엔 그럴 유인이 별로 없다. 헤크세르-올린 모형을 고안한 국제경제학의 대가 엘리 헤크셰르는 이미 1935년에 보호무역주의는 생산자를 위해 소비자에게 걷는 간접세와 같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국의 세계질서 재편 움직임을 경제학적 논리로만 반박해서도 안 된다. 적어도 중국의 불공정 경쟁 행위 제한과 핵심 안보 품목의 대외의존도 감축은 미국뿐 아니라 다른 선진경제권 국가들도 모두 추구하는 목표이다. 기존의 자유무역체제가 불균등한 피해를 본 산업, 기업, 노동자, 지역공동체를 충분히 돌보지 못했다는 지적 역시 타당하다. 트럼프가 아니었어도 세계 무역 질서의 모순은 이미 오래전부터 드러나고 있다. 트럼프가 아니었어도, 세계 무역 질서의 재편은 필요한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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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방식이다. “트럼프 라운드”는 대안이 될 수 없다. 무역협상은 국제분업에 참여하는 서로 다른 주체들이 손해와 이익을 고르게 분담하도록 조율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그리어의 칼럼은 협상을 통해 미국이 다른 나라로부터 얼마나 많은 걸 얻어냈는지만 나열했다. 그리고 소비자의 피해는 아랑곳없이 제조업자가 얼마나 큰 이익을 얻을지만 강조했다. 국가 간 조정과 국가 내 조정이 빠진 일방적인 협상은 질서가 아닌 무질서를 만들어낸다. 무질서는 미국을 포함한 누구의 이익도 증진해주지 않는다.

지금으로선 우리나라엔 미국의 주도권을 따라가는 선택지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어 자신도 강조했듯 이익과 손해가 불균형하게 분담된 무역체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미국의 이익만 반영하는 트럼프 라운드 역시 결실을 보기도 전에 와해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 정부는 미국과 계속 대화하면서 유럽연합, 캐나다, 멕시코, 일본, 아세안뿐 아니라 인도와 중국까지도 협력 상대로 삼아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세계질서를 고안해 나가는 데 필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비교우위에 따른 특화와 교환으로 상호 이익을 누리되, 무역 참여국의 경제와 국가안보는 침해하지 않고, 자유무역의 이익을 경쟁에서 뒤처진 기업·노동자·지역에 재분배하는, 자유롭고 포용적인 세계 무역 질서가 미래의 대안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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