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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일본 도쿄 신주쿠역 앞 광장에서 시민단체 ‘일본군 성노예제 부정을 용서하지 않는 4·23 행동’(4·23 행동)과 한·일 청년 등 100여명이 일제겅점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23일 일본 도쿄 신주쿠역 앞 광장에서 시민단체 ‘일본군 성노예제 부정을 용서하지 않는 4·23 행동’(4·23 행동)과 한·일 청년 등 100여명이 일제겅점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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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성노예제를 부정하는 게 용서돼선 안된다!”

23일 일본 도쿄 신주쿠역 앞 광장에 모인 한·일 청년 등 100여명은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한 행사 참가자는 “많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일제강점기 여성으로서, 조선인으로서 존엄을 짓밟히고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지만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죄와 배상은 없었다”며 “되레 역사 부정론과 부정의한 역사의 확산이 계속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시민단체 ‘일본군 성노예제 부정을 용서하지 않는 4·23 행동’(4·23 행동)은 발족 10년을 맞은 이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사죄·배상을 거부하며 되레 피해자 공격하고 있다”며 “침략 전쟁과 역사를 부정하는 움직임에 맞서 행동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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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 행동은 한반도 출신 여성들 가운데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처음 밝힌 배봉기(1914~1991) 할머니를 기억하기 위해 2015년 만들어진 모임이다. 배 할머니는 평생을 기구한 삶을 살다 1991년 10월18일 오키나와 나하시 마에바시에서 숨졌다. 그는 1914년 9월 충남 예산군 신례원리에서 태어난 일제강점기이던 1943년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오키나와로 들어왔다. 이어 1944년 11월부터 1945년 3월말까지 도카시키섬에서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1945년 일본 패망 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품은 채 오키나와에 뿌리를 내렸다. ‘전쟁터에서의 일’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1972년 미 군정에서 벗어난 오키나와가 일본에 재편입되면서 뜻밖의 추방 위기를 겪게 된다. 배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라는 사실을 밝히고 특별영주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 1975년 현지 언론, 1977년 4월23일 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에 할머니의 기구한 사연이 소개됐다.

배 할머니가 유명을 달리한 1991년은 한국에서 고 김학순 할머니의 피해 증언으로 본격적인 위안부 활동이 시작됐던 해다. 그러나 배 할머니는 쓸쓸하게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2015년 시작된 4·23 행동은 배 할머니의 사연이 알려진 4월23일에 맞춰 해마다 위안부 피해자를 위로하고 일본 정부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이날 참석자들은 또다른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곽금녀’, ‘강덕경’, ‘길원옥’, ‘이경수’ 등의 이름을 부르며 이들의 아픈 사연을 낭독하는 행사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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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글·사진 홍석재 특파원

forchi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