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성년자 성착취범 제프리 엡스틴의 범행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취지의 이메일이 12일(현지시각) 공개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성착취 피해자와 오랜 시간 함께 있었다’며 범행 가담 개연성을 암시하는 내용도 들어있다. 더 많은 내용이 있을 거로 추정되는 법무부 자료의 전체 공개를 강제하는 법안도 다음주 하원 본회의에 상정돼 통과할 것으로 보인다. 연방정부 셧다운(부분 업무 정지) 사태가 마무리됨과 동시에 트럼프 대통령의 엡스틴 사건 연루 의혹이 정국의 핵심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하원 정부감독위원회 민주당 의원들이 이날 공개한 2019년 이메일에서 엡스틴은 “트럼프는 나보고 (마러라고 리조트) 회원에서 물러나라고 했다고 하지만, 나는 애초에 회원이 아니었다”며 “그는 당연히 소녀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길레인에게 멈추라고 했으니까”라고 적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미성년자 성착취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범행을 도운 엡스틴의 여자친구 길레인 맥스웰에게 이에 관해 언급했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이메일 수신자는 언론인 마이클 울프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연루됐다는 뉘앙스의 이메일도 있다. 2011년 4월 엡스틴은 맥스웰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그 짖지 않는 개는 트럼프다. (익명의 피해자)가 그와 함께 우리 집에서 몇 시간을 보냈지만, 단 한 번도 (트럼프의 이름이) 거론된 적이 없다”고 적었다. 맥스웰은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답했다. 현재 교도소 복역 중인 맥스웰은 지난 7월 트럼프 행정부 법무부 부장관과 면담에서는 “대통령이 부적절한 상황에 있는 것을 목격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공화당 의원들은 해당 인물이 엡스틴의 가장 유명한 피해자 중 한 명인 버지니아 주프레라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4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생전 주프레는 트럼프가 자신에게 부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말해왔다. 공화당은 민주당이 이런 이유로 피해자의 이름을 숨겼다고 비판했다. 공화당은 민주당이 정치적으로 유리한 내용만 선별 공개했다며 2만건이 넘는 추가 문건을 공개했다.
하원 감독위원회는 지난 9월 법무부로부터 3만여 쪽의 엡스틴 관련 기록을 넘겨받았으나, 피해자 보호 등을 이유로 상당 부분이 비공개로 남아 있었다. 반면 엡스틴 유산 관리인 쪽은 위원회 소환장에 응해 이메일·달력·통화기록 등을 대거 제출했고, 이번에 공개된 세 건의 새 이메일도 여기에서 나왔다.
엡스틴과 트럼프 대통령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쓴 언론인 마이클 울프가 2015년 트럼프의 공화당 경선 토론회를 앞두고 관련 질문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며 대응책을 논의하는 내용도 있다. 울프는 이메일에서 “트럼프가 ‘엡스틴의 집에 가보지 않았다거나 전용기를 타본 적 없다’고 말하면, 너에게는 그걸 반박할 정치적 카드가 생긴다”며 “그를 곤란하게 만들 수도, 혹은 나중에 빚을 지게 만들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엡스틴이 2015년 “도널드와 수영복을 입은 소녀들이 내 부엌에 있는 사진을 보고 싶으냐”고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제안하는 이메일도 공개됐다.
캐럴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이 이메일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입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에 “민주당은 셧다운과 여러 다른 사안들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형편없이 했는지를 덮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려 하기 때문에, 엡스틴이라는 이름을 다시 끄집어내고 있다”고 적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엡스틴 연루 의혹은 셧다운 해제와 함께 다시 불붙을 것으로 전망돼왔다. 지난 9월 23일 애리조나 7선거구에서 열린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민주당 아델리타 그리할바 의원이 결정적 변수였다. 그는 셧다운 해제를 위한 임시예산 법안 투표를 위해 하원이 문을 열면서 이날 하원에 정식 입성했다. 즉시 ‘법무부 전체 자료 강제 공개 법안’을 본회의에 상정하는 청원서에 218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과반의 하원의원이 이름을 올리면서 청원서가 성립되자 공화당 소속 마이크 존슨 미 하원의장은 “어차피 진행될 거라면 빠르게 처리하겠다”며 다음주 본회의에 ‘법무부 전체 자료 강제 공개 법안’을 상정해 표결에 부치겠다고 이날 공식 발표했다.
지난 7월 트럼프 행정부가 기존 입장을 뒤집으며 ‘엡스틴 파일 비공개’ 결정을 내린 직후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그룹과 이에 동조하는 공화당 의원들 상당수가 엡스틴 파일 공개를 주장했다. 이후 ‘자료 공개파’는 서서히 줄었다. 하지만 이날 성립된 ‘자료 공개 청원서’에 끝내 4명의 공화당 의원이 이름을 올리면서 역할을 했다. 다만 엡스틴 사건을 ‘엘리트 권력자들의 은폐’라는 음모론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극우 성향의 마조리 테일러 그린·로렌 보버트 의원,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토대로 피해자와 연대하는 입장에 선 낸시 메이스 의원, 트럼프와 거리를 둔 자유지상주의적 보수 성향의 토머스 매시 의원 등 각자 입장은 다르다. 하원 통과 이후에도 법제화까지는 상원 통과 및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등 넘어야 할 산이 남아 있다.
워싱턴/김원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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