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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직장·취업

시장이 아니라 시장만능 주의가 문제입니다

등록 :2021-06-26 16:04수정 :2021-06-26 16:06

[토요판] 이병남의 보내지 못한 이메일
(마지막회) 시장, 기업, 그리고 개인

자본주의보다 열배 더 오래된 ‘시장’
규제 없는 시장은 만인의 불행일 뿐
시장 자체 아니라 시장만능이 문제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지난 5월15일 스승의 날, 고등학교 시절 영어를 가르쳐주시던 강송식 선생님께 안부 전화를 드리려고 오전 9시가 되기를 기다리는 참이었습니다. 근데 8시55분에 휴대전화가 울렸습니다.

“아니, 선생님 제가 전화드리려는 참인데 먼저 전화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투정 섞인 말투로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이 웃으며 답하십니다.

“오늘 아침 <한겨레>에 실린 자네 칼럼을 보고 너무나 좋아서 전화한 거야! 자넨 언제 그렇게 공부를 많이 했나? 난 엉터리 선생이었지만 자네 같은 제자가 있으니 정말 행복해!”

선생님께 칭찬을 받으니 좀 겸연쩍었지만 진심으로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저 역시 행복해졌습니다.

지난 1년 반 동안 저는 이 칼럼과 함께 살았습니다. 대강의 주제를 정하고 나면 라디오를 들을 때, 신문이나 책을 읽을 때, 텔레비전이나 유튜브 영상을 볼 때, 그리고 지인들과 대화하면서 칼럼과 관련된 내용이다 싶으면 메모하고 정리해서 제 글에 녹여 넣으려 했습니다. 글이 되어가면서 제 생각도 정리되고 분명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관심의 폭을 넓혀갔습니다. 적지 않은 피드백을 받았는데 제가 많은 사람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었습니다. 칼럼을 마무리하며 몇 가지 이야기를 덧붙이고자 합니다.

1. 시장과 시장주의

제가 10~20대였을 때는 한국이 산업화에 총매진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또 많은 부작용들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이 시작되면서 대학 캠퍼스는 반독재 투쟁의 보루가 되었습니다. 울분과 저항의 시대였지요. 이런 시대적 배경이 제가 유학을 할 때 전공을 노사관계로 정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차차 노사관계는 인사관리와 뗄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인사관리라는 것은 회사의 경영 방식, 경영 전략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1980년대 당시 미국 기업들은 독일과 일본에 견줘 경쟁력이 뒤졌다는 인식하에 일하는 방식을 새롭게 하고자 하는 엄청난 자기혁신을 시도하는 시기였습니다. 이렇게 혁신을 만드는 시장의 힘과 역할도 저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시장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자본주의가 불과 200~300년밖에 안 된 것에 비해 시장은 인류 역사와 함께해왔을 뿐만 아니라 문명 발전을 촉진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있는 그랜드 바자르가 시장 기능을 해온 지 3천년, 모로코의 제마엘프나 광장은 1천년이 넘었습니다. 삼국유사를 보면 환웅이 배달국을 세우며 재세이화(在世理化)하고 홍익인간(弘益人間) 했으며, 또 치시교역(置市交易)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최소 5천년 전에 이 땅에 시장을 열어서 서로가 거래함으로써 모두가 윤택하게 살도록 했다는 것이지요. 이토록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장은 오랫동안 인류와 함께해왔습니다.

그렇지만 시장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규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착취와 불행, 비극이 옵니다.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에 의해서 공정경쟁이라는 규칙이 무너질 때 독과점에 의한 시장 왜곡이 발생합니다. 고전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우리가 아침에 맛난 빵을 먹을 수 있는 건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빵을 팔아서 돈을 벌겠다는 그의 이윤 동기 때문이며 각자가 자신의 유익함을 추구하며 일할 때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장 기능이 작동해서 모두에게 유익함을 준다고 말했지요. 그런데 그는 그 ‘보이지 않는 손’이란 사실은 신의 섭리라고 말했습니다. 신의 섭리가 착취와 불행과 비극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시장에서 규칙에 따라서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질 때만 신의 섭리가 작동하는 것이지요. 신에게는 인간의 참여와 협조가 있어야 합니다. 규제 없는 시장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불행을 가져올 뿐입니다. 소위 시장(만능)주의자들이 애덤 스미스를 끌어들이고 의지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합니다. 시장이 문제가 아니라 시장 만능 사상이 문제입니다.

주주·종업원·지역사회에 유익할 때
시장이 기업에 이윤과 성장 보상 줘
구성원 잠재력 발휘하는 경영 필요

2. 개인·기업의 이윤 동기와 지속가능성

공정경쟁의 룰이 확보된 시장에서는 참여자인 기업과 개인의 이윤 동기가 중요합니다. 새로운 사업을 일으키는 기업가의 가장 바탕에 있는 심리는 “아, 이걸 하면 돈이 되겠구나”라는 아이디어와 의욕입니다. 새로 들어오는 신입사원들은 대부분 잘 먹고 잘살고 싶어서 입사합니다. 회사의 공유가치와 장기적 관점은 회사에 다니면서 차차 배우고 익히는 것입니다. 이윤 동기라는 ‘추동하는 생명에너지’(initiating life energy)가 없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업이 단기간에 이윤만 남기고 폐업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것이 필요합니다. 고객, 협력사, 금융기관, 주주, 종업원, 지역사회 등 모든 이해관계자에게 각각 유익함을 돌려줘야 합니다. 그럴 때 시장은 그 기업에 지속할 수 있는 이윤과 성장을 보상으로 주는 것입니다. 남들에게 잘해줄 때 내게도 유익함이 돌아온다는 이타자리(利他自利) 경영이지요.

이윤 극대화는 단기적인 경영 목표가 될 수 있지만 기업의 존재 목적은 아닙니다. 저는 기업이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주체라고 생각합니다. 기업은 본질에서 사회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란 기업이 모든 이해관계자를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할 바를 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기부나 봉사활동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입니다. 근래에 회자되는 이에스지(ESG, 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지배구조 영역이 제대로 작동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투명성과 책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이나 스웨덴의 오래된 기업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소유주 경영인가 전문 경영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경영 방식과 승계 과정이 투명하고 경영의 결과에 대해서는 분명히 책임지는가 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지배권의 정당성을 확보해야만 오래갈 수 있습니다.

3. 성장의 장으로서의 직장

시장에서 기업뿐 아니라 저는 직장에서 일하는 개인도 성장감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노동을 통해서 개인은 생계를 유지하고 물질적 삶의 수준을 향상할 뿐 아니라, 일 자체에서 보람을 느끼고 자신이 성장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업이 개인을 채용하는 일차적 동기는 일을 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도구적 관점이지요. 노동은 자본, 토지, 기술 등과 같은 생산요소로서 효율성 원칙이 적용됩니다. 모든 개인은 능력과 성과를 평가받고 그 결과의 높낮이에 따른 인사의 대상이 되는 이유죠. 하지만 노동에는 다른 생산요소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특성이 있습니다. 육체와 더불어 이성, 감정, 영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점이지요. 따라서 노동은 활용되는 자원이기도 하지만 가치를 만들어내는 창의성과 자발성의 주인으로서 주체적 원천이기도 합니다. 결국 기업이 시장경쟁에서 생존하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조직구성원들이 각자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경영해야 합니다. 내가 일하는 회사가 자랑스럽고 떳떳할 때 조직구성원은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것이 리더의 가장 큰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직의 리더는 버텨내는 인내심이 커야 합니다. 구성원들과 겨루고 견디고 버텨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원칙을 지키고 미래 조직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서입니다. 얼마 전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는 후배가 찾아와 한 중간책임자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인데 조직 마인드, 사업 마인드는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단체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함께한 사람이라 고심했는데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답니다. 개인적인 프로젝트만 하도록 결정한 것이지요. 반발도 겪었지만, 정리가 끝난 뒤 그 후배가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가 너무 일 중심적인가요?” 저는 답했습니다. “자네가 일 중심적이라서 참 다행이야!”

그렇습니다, 구성원에게 졌을 때 참으로 행복할 때가 있습니다. 나보다 더 고민하고 더 노력해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해결책을 만들어 왔을 때, ‘아, 내가 졌구나!’ 싶을 때, 정말 희열을 느끼지요. 그런데 이 경우는 리더로서의 자신과 그 구성원이 같은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는 전제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조직에서 뜻이 맞는 구성원을 만나는 건 참으로 행운입니다. 리더는 때때로 속이 꺼멓게 타들어갑니다. 버티기에 지쳐서 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리더는 힘든 역할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리더 될 필요는 없고
소유주경영인가 전문경영인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투명성과 책임성’
결과 책임져야 지배권도 정당해져

4. 은퇴 뒤에도 성장한다

6월 초 제주에 내려갔다가 새로 개관한 포도뮤지엄의 전시회에 갔습니다. ‘너와 내가 만든 세상’이라는 1층 전시는 오늘날의 혐오와 증오의 비극을 극적으로 표현해 감동적이었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니 ‘아가, 봄이 왔다’라는 독일 화가 케테 콜비츠(1867~1945)의 전쟁 판화, 조각상 전시가 나왔습니다. 1·2차 세계대전에서 아들과 손자를 잃은 어머니의 애통함이 너무나도 절절했습니다. 문득 한쪽 벽에 있는 그의 일기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노화(나이 듦)는 청춘의 나머지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상태이다.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위대한 상태이다. 내 안에 있는 그 어떤 것이 새로워지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바로 자기 발전이라는 의미에서 노화(나이 듦)였다. 영원히 타오르는 촛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1921년 11월, 일요일 일기 중에서)

지난 회에 ‘은퇴 뒤 삶은 또 다른 차원에의 성장’이라고 썼는데 ‘완전히 새로운 상태’라는 콜비츠의 말과도 맞닿아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며칠을 지내고 든 새로운 생각은, ‘이제 내가 무슨 일이나 사회적 역할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는 중요하지 않구나. 내 마음이 어떤가가 중요하구나’였습니다. ‘세상에 나아가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생을 멀리 지냈던 나 자신의 그림자와 친해지고, 저기 한구석으로 밀어놓았던 외로움, 열등감,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이제, 이 ‘완전히 새로운 상태’에서 내가 비로소 거리낌 없이 나 자신으로서 산다면, 세상과의 접촉을 통해서 나의 내면이 더 풍성해지고 즐겁고 자유로워질 수 있구나!’ 그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이 칼럼을 제안받은 2019년 12월, 국내에선 아직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이었습니다. 1회를 쓰고 나서 이제 1년 반이 지났습니다. 저는 3주 전에 1차 백신을 맞았습니다. 몇달 후에는 외국에 사는 가족들을 만나러 갈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으면서 열아홉번째 칼럼을 마칩니다. 귀한 신문 지면에 내가 글을 쓴다는 게 주제넘은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처음에는 망설이기도 했었지만 내가 생각하고 겪고 얻은 것들을 젊은 후배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의미 있겠다는 제안에 용기를 냈습니다.

글을 쓰면서는 ‘라떼’와 ‘꼰대’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저 나름대로 애를 많이 썼습니다. 돌이켜보니 그 과정에서 저 자신도 또 다른 차원에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은퇴와 노화를 회피하지 않고 몸과 마음으로 그대로 겪고 버텨내면서 이 칼럼을 써왔던 듯합니다. 그리고 이제 오랫동안 익숙했던 삶의 터널을 서서히 빠져나오면서 새로운 세계로 들어설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끝>

※ 그동안 <한겨레> 토요판을 빛내주신 필자님과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이병남.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조지아주립대에서 경영학을 가르치다 1995년 엘지(LG)그룹 임원으로 입사해 인사, 교육, 노사관계 및 지배구조 업무를 맡았다. 2008년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인화원장으로 부임해 8년간 원장직을 수행하고 2016년 퇴임. 인간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지만 이를 풀어낼 해법 역시 인간에게서 비롯된다는 그의 경영 철학은 저서 <경영은 사람이다>(2014)에 담겼다. 인간 존중이라는 경영의 본질을 잊지 않고 21년간 숨 가쁘게 현장을 누벼온 그가 일터에서 겪는 우리의 고민을 함께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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