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엠에프(IMF) 위기와 세기말을 거친 2000년대의 출발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신용카드 대란으로 신용불량자가 속출했고,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미명 하에 진행된 신자유주의 정책들로 비정규직이 양산되었다. 공공부문 민영화 등의 시도로 사회적 안전망들도 해체의 위협 속에 있다. 2008년 금융위기가 더해지며 한국사회의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었고, 사람들은 자신이 순식간에 극빈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잠재적 공포 속에서 살게 되었다.
어느 일요일 저녁 아이와 함께 TV프로그램 ‘1박 2일’을 보다가 흠칫한 적이 있다. ‘복불복’ 게임을 진행하면서 코너 출연자들은 “나만 아니면 돼!”라는 구호를 외치며 낄낄댔다. 어쩌면 이 구호에는 공동체에 대한 기대를 접고 오로지 생존 그 자체가 목표가 된 우리 사회의 무의식이 투영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까나리 액젓’의 불행이 나만은 비켜가기를 바라는 서글픈 바람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유혹 ‘성공’
전락의 공포 때문이었을까? 2000년대 벽두부터 성공의 비밀을 알려준다는 자기계발서들이 속속 베스트셀러로 등장한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 <인생을 두 배로 사는 아침형 인간>, <마시멜로 이야기>,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긍정의 힘>, <시크릿>, <이기는 습관>, <블루오션 전략> 등 2000년대 내내 한 해 한두종 씩의 자기계발서가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많은 자기계발서들의 화두는 성공이었으며, 성공의 민낯은 물신주의였다. 백만장자 조나단이 리무진 기사 찰리에게 4살 때 자신이 참여했던 마시멜로 실험의 교훈을 성공 비결로 전수해주는 <마시멜로 이야기>(2006)는 그 한 사례이다. 마시멜로 실험이란 15분을 참으면 마시멜로를 하나 더 준다는 규칙을 지키고 유혹을 견뎌낸 아이들이 그렇지 못한 아이들보다 이후 더 큰 성취를 이루었다는 내용이다. 조나단은 살아오면서 자신이 참아냈던 것들을 찰리에게 들려준다.
그의 세련되어 보이는 인내론을 한국적 맥락으로 번안해보면 이런 것이다. 15분만 참으면 마시멜로를 하나 더 얻을 수 있듯이, 중고교 시절 6년 동안 한눈팔지 말고 공부에 열중하면 남이 우러러 보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 이후 대학 4년 동안 꾹 참고 고시 혹은 취업 준비에 몰두하면 판검사·의사가 되거나 대기업에 취직하고 미인 아내 혹은 1등 신랑감을 남편으로 맞이하여 성공을 이룬 부자로 살 수 있다.
많이 들어본 소리 아닌가. 한국은 마시멜로 법칙을 평생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사회이다. ‘30분만 공부하면 남편(마누라)이 바뀐다’는 급훈을 걸고 공부하는 학생들, 영화 <사도>를 보여주며 ‘공부 안하면 저렇게 죽는다’는 겁박과 함께 편백나무 뒤주 공부방을 구매하는 극성스런 학부모들이 사는 곳이 한국사회이다. 조국근대화를 위해 지금의 고통을 감내하라는 박정희 시대의 구호로부터, 분배라는 유혹을 참고 성장을 이루면 그 결실이 사회 전체에 골고루 퍼질 것이라는 이명박 시대의 ‘낙수론’에 이르기까지 국가 차원에서도 마시멜로 법칙의 나팔소리는 가득차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그 인내에 합당한 보상을 받았는가?
“15분 참으면 달달한 마시멜로!”자기계발서가 밀리언셀러로‘노오오력’해도 안되는 현실에서20대끼리 연대하라는 조언까지성공 사다리 중 하나가 토익점수영어교재 역시 밀리언셀러로강점기말 일본어 상용주의자현영섭이 감격해할지도 몰라금융위기로 마냥 힘겨울 때목놓아 부른 엄마, 어머니성공을 위한 사다리, 영어학습서
불안의 시대, 성공에 이르는 확실한 사다리 중 하나는 토익점수였다. 한국의 토익 수험생은 100만~120만명에 육박하기에 이들이 선택한 교재는 곧바로 밀리언셀러로 진입하게 된다. 2000년대 영어공부 실용서 시대를 연 정찬용의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마라!>(1999)는 200만부 이상이 팔려 나갔다. 이후 이익훈의
외국어 습득은 또 다른 세계를 획득하는 유용한 수단이다. 이 유용한 수단인 외국어가 생을 걸어야 하는 목적으로 전도될 때 여러 문제가 불거진다. 더 좋은 발음을 위해 아이의 설수대를 제거하는 수술을 하고, 옹알이하는 아이에게 영어 학습을 시키는가 하면, 영어유치원, 영어연수, 조기유학으로 이어지는 한국사회의 영어 광풍은 비정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교수 임용에서 영어강의는 필수이며, 강사와 학생 모두 제대로 소통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영어강의가 진행되는 코미디 같은 일이 한국의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다.
일제 식민지 시기 말엽 현영섭이라는 철저한 내선일체 일본주의자가 있었다. 그는 일본어가 동아시아 공용어가 되어 가는 상황에서 일본어를 통해 조선인의 감정, 개성을 표현함으로써 조선문화가 세계적 보편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강변했다. 장래의 세계공용어가 될 일본어를 사용하는 것이 진보이며, 따라서 조선인들도 어려서부터 일본어만을 상용해야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요즘의 어린아이들은 학원에서 외국 이름으로 개명하고 정말 열심히 영어를 배운다. 현영섭이 지금의 한국사회를 본다면 자신의 세계화의 이상이 21세기판 ‘창씨개명’과 ‘영어전용(론)’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음에 감격할지도 모를 일이다.
88만원 세대와 청춘 멘토
성공을 위해 미칠 듯이 ‘노오오력’을 해도 한국 청년들의 형편은 점점 어려워져만 갔다. 청년과 관련된 표현들―삼포세대, 청년실업, 비정규직, 프리터, 워킹 푸어, 최저임금 등은 암울하기만 하다. 이 암울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88만원 세대: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2007)의 저자 우석훈·박권일은 청년 세대들에게 분노하고, 행동하라고 권유했다.
그들에 따르면, 2007년 당시 20대는 약 88만원 수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될 확률이 높았다. <88만원 세대>의 저자들은 20대들이 세대 내의 경쟁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이전 세대인 386 세대, 유신 세대와의 경쟁을 계속해서 이어가야만 하는 현실을 전해준다. 그리고 고립적 노력만으로는 풀지 못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20대여,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라고 조언했다.
‘짱돌’은 ‘20대끼리의 연대’를 지칭하는 은유이다. 저자들은 청년들이 연대하여 자신들 세대를 대변할 정치세력이 되고 행복 실현의 주체가 되라고 격려했다. 당연히 이러한 세대 내 연대가 다른 세대와의 또 다른 연대로 이어질 때 청년들의 삶의 여건은 나아질 수 있다. 기성세대 때문에 청년의 일자리가 없다며 세대간 갈등을 자극하는 ‘청년고용을 위한 임금피크제’ 등이 떠벌려지는 지금-여기에서 <88만원 세대>의 논의들은 여전히 현재형의 담론일 수밖에 없다.
‘짱돌’을 권유하는 <88만원 세대>의 저자들보다 온화하고 세련된 화법을 구사하는 청춘멘토들도 등장했다.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2011)는 리듬감 있고 유려한 문체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구체적인 예화들을 통해서 청년들에게 자기계발을 위한 여러 조언을 전한다. 청년들과 눈맞추고 그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그의 진심을 오해할 필요는 없지만, 그의 조언 중에는 불편한 대목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눈앞의 실익에 매몰되어 대성하지 못하는 ‘개그맨의 적금’ 예화라든가, 청년들에게 자신을 더 높은 브랜드로 창출하라는 그의 전언들은 마시멜로적 성공론을 꿈의 실현이라는 당의정으로 포장한 혐의가 짙다.
특히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에 비해 시련을 겪는 청년들을 ‘경험의 상속(자)’이라고 칭송하고, “그대의 가난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라”라고 설파하는 대목에서는 울컥하게 된다. ‘수저 계급론’이 회자되는 사회적 구조를 외면하고 개인의 열정으로 그 모순된 구조를 뛰어넘으라는 조언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내게는 마치 ‘억울하면 성공하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의 멘토링에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분노, 그것을 고쳐나가기 위한 사회적 연대에 대한 고민과 조언을 찾을 수 없다. 청년세대들에게 여전히 긴요한 것은 상징적 바리케이트와 짱돌인데도 말이다.
가족주의와 ‘엄마 신드롬’
세상이 힘겨워 질 때면 가족과 모성/부성이라는 익숙한 주제가 부상한다. IMF 시절 ‘아버지 열풍’과 2008년 금융위기 전후의 ‘엄마 신드롬’은 그 방증이다. IMF 시절 가족해체 위기는 2000년대로 이어졌고, 새천년의 벽두부터 대중들은 조창인의 <가시고기>(2000), 김하인의 <국화꽃 향기>(2000)와 같이 자식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부모들의 지고지순한 가족애를 그리는 소설을 열독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2008년 이후 손숙의 <어머니>와 강부자의 <친정엄마와 2박 3일>, 나문희의 <잘자요 엄마> 등의 연극, 김혜자 주연의 영화 <마더>, 틱낫한의 책 <엄마>, EBS 방송 <엄마의 힘>에 이르기까지 가히 ‘엄마 신드롬’이라고 할만한 문화 현상이 일어났다. ‘엄마 신드롬’의 압권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2008) 열풍이었다. 출간 9개월만에 밀리언셀러에 오른 이 소설은 24개국에 저작권이 수출되었으며, 신경숙은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적인 작가가 되었다.
지하철에서 실종된 엄마를 찾아나선 큰딸, 큰아들, 남편과 엄마 자신의 시점과 기억이 합쳐져 ‘엄마’라는 존재를 확인해가는 서사를 통해, 작가는 태어날 때부터 엄마가 아닌 자신의 인생이 있는 ‘박소녀’라는 한 여성의 삶을 부조한다. 사회·경제적 위기로 삶이 뿌리채 흔들린 대중들은 신경숙의 이 소설 속에서 한국의 가족주의의 중심에 있는 농경사회적 정서와 전지전능한 모성을 그리워하며 위로받은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엄마를 부탁해>의 잃어버린 엄마를 되찾지 못할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이 불안과 위기의 시기에 당면한 문제의 핵심은 ‘가족 의존적 정치경제’가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다는 것을 직시하는 것이다. 농경사회적 모성의 향수만으로는 우리의 불안을 해결할 수 없다. 많은 이들이 위기와 불안의 시대에 ‘믿을 건 가족뿐’이라고 되뇌고 있지만, 이 위기와 불안을 이기는 진정한 대안은 가족이 수행하던 기능을 사회화하는 것뿐이다. 이제 농경사회적 모성이라는 엄마의 신화를 떠나보내고 그것을 대체할 사회적 공공성의 모색과 국가 역할의 확충을 요구할 때가 되었다.
정종현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인문한국(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