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비판적 인문·사회과학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지만, 장구한 독서 문화사에서 문학의 역할에 대해서도 간과하면 안 될 것이다. 학습참고서나 성경을 제하면 문학은 언제나 가장 많이 읽힌 범주의 책이었고, 앞으로도 교양과 세계인식의 가장 강력한 도구로서 기능할 것이다.
문제는 한국문학인 듯하다. 표절 논란 중 어떤 점잖은 분이 신경숙과 창비 비판자들을 향해 먼저 네 자신이나 돌아보라길래 한번 성찰해봤더니 내 마음과 머릿속엔 불신과 환멸이 가득했다. 나 자신 문학도이면서도 언젠가부터 한국 비평(가)과 문학상을 믿지 않았고, 한국문학 독서의 ‘냉담자’처럼 되었던 것이다. 왜 그렇게 됐을까?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과연 한국의 교양인들과 노동자계급에게 한국문학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 예컨대 한때 사표 같았던 조정래·황석영의 문학은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어떻게 여겨지고 있을까?
90년대 이후 독자층 꾸준히 이탈표절 논란, 필요악이었을 수도문단권력 세대교체…신뢰회복 기대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 독자층은 지속적으로 와해돼 왔다. 대신 외국문학 작품의 역할이 더 커진 듯하다. 20~40대 여성을 제외한 계층에서, 한국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뭔가 어색하고 마니악한 일이 되고 있다. 올해의 스캔들이 이를 가속화시키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어쨌든 표절 사태의 후과로 창비 편집인과 문학동네의 일부 편집위원들이 퇴진했다. 오랜 세월을 지닌 <문학과사회>의 편집진도 바뀌고 <세계의문학>도 변신을 시도한다 한다. 이 같은 변화는 문학사적·지성사적 의미가 있다. 한국 문단에서 4·19세대가 이제 드디어 ‘종착역’에 다다르고 586세대가 한발 이상 물러나게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문단은 단번에 많이 젊어진다. 최근 편집위원으로 발탁된 비평가들은 전임들에 비해, 더 많은 경우 비정규직이며 주로 30대들이다. 아마 그들은 더 정치적이고 덜 권위적일 것이다. 비평가 강동호의 말대로, 그래서 신경숙 표절 논란은 한국문학에 필요한 ‘사건’(바디우적 의미의)이었는지도 모른다. 기대해보련다.
새로운 ‘문학체제’가 해야 할 일은 좋은 작가를 발굴하고 새로운 문학적 전범을 구성하는 일뿐만은 아니다. 한국문학이 주주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서 공공재로서의 위상을 회복하게 하는 일과, 새로운 미디어 현실에 부합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그 수렴점은 독자들이 다시 한국문학을 찾게 하는 일일 텐데, ‘신뢰 회복’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정환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