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늘한 전시실에서 700~800여년 전 청자 무늬들은 뜨겁게 약동한다. 연꽃잎 하나, 용의 발톱 한 조각, 동자의 눈썹 하나도 침묵하지 않는다. 구름바다에서 솟구치는 용의 몸매와 학의 가뿐한 날갯짓, 그리고 리듬감으로 율동 치는 국화 꽃잎의 흩날림이 공간을 채우는 판타지다.
최근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문을 연 호림박물관 분관의 개관 특별전 ‘고려청자’(9월20일까지)는 청자 무늬의 놀라운 재발견을 선사한다. 담백한 하늘빛(혹은 자줏빛) 자기 표면 위에서 갖가지 동식물 이미지들이 춤춘다. 자연과 인생의 순환에 정직했던 고려인들은 그 감정과 느낌을 절묘한 선과 색감, 구도로 뽑아내는 데 발군이었다.
비공개작이 상당수인 출품작 170여점 또한 색과 선, 무늬로 그 시대의 예술 의지를 말한다.
전시의 길은 별빛 빛나는 천장을 보며 들어가는 현관을 거쳐 4층 1전시장으로 올라가면서 열린다. 들머리 순수 비색의 무늬 없는 뚜껑매병이 단단한 자태로 기다린다. 그 병이 마음을 다잡아주는가 싶더니 기세등등한 용의 승천을 그린 파룡문 매병과 운룡문 항아리가 눈길을 돌려세운다. 항아리 모양은 엄정한 대칭이나, 각기 돋을새김 정도를 달리해 미세한 입체감까지 고려한 구름과 용무늬의 세부는 기품 속 격정을 숨긴 고려인의 성격을 반영한다.
매병들을 두리번거리며 한 층 내려가면 점입가경이다. 큼지막한 학들이 사방팔방 노니는 표면에 괴수의 머리와 깔끔한 넝쿨 모란 무늬가 사방에 박힌, 지름 50㎝가 넘는 거대한 항아리가 맞는다. 이 전시의 대표작품 청자대호다. 이번에 첫 공개라는 이 국내 최대급 청자는 덩치에 말리지 않는 정교한 무늬의 격조감을 지키고 있었다.
고려 도자기의 표현은 당대의 전위였다. 엷은 빛에 잔 선으로 파초를 그린 매병이며, 구름 하나 옆에 끼고 자신도 구름처럼 형상이 변해가는 학의 고독한 자태를 담은 철화운학매병 등이 실험성을 증거한다. 그 무늬들은 맹목이 아닌, 도저한 생명력을 바탕 삼은 것이었으니, 자줏빛 화폭에 국화 꽃잎과 넝쿨들이 군무를 추듯 생동하는 철채 무늬 매병이 죽비처럼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사찰의 ‘가드 레일’로 쓰였으리라 짐작되는 철화 연꽃무늬 난주(난간 기둥) 표면에는 잎끝이 살아 꿈틀거리는 연꽃이 하늘거린다.
이 현란한 잔치 끝물에 작은 대접, 찻잔 등을 산책하듯 내려다보는 2층 3전시실이 있다. 그곳 한켠의 상감 잔에서 꽃 들고 만사를 달관한 동자의 표정을 본다. 고려가 꿈결처럼 지나간다. 월 휴관. (02)541-3523~25.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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