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쾰른을 가로지르는 라인 강변에 탑 하나가 홀로 우뚝 서 있었다. 탑을 잇던 성벽이 허물어지고 유일하게 남은 유적이다. 800년도 넘은 5층 높이의 이 탑은 ‘바엔투름’(Bayenturm)이라고 한다. 마녀가 살거나, 마녀에게 주술 걸린 라푼젤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탑 같기도 하다.
입구에서 벨을 누르자 어두운 복도가 드러났다. 벽에 걸린 액자에는 검은 브래지어, 커다란 가위, 마녀가 탔을 법한 빗자루 등이 전시돼 있었다. 이 탑은 1994년부터 ‘여성미디어탑’(FrauenMediaTurm)으로 불린다. 독일의 작가 겸 여성운동가 알리스 슈바르처가 중심이 되어 여성운동 아카이브 관리 재단을 만들었고, 그 단체가 바로 이 역사적 건물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8만6000개 이상의 문서들과 9000개 이상의 사진, 포스터 등이 소장돼 있다. 19세기부터 200년에 걸친 페미니스트의 사상과 행동을 기록한 ‘세계 유일, 최대의 페미니즘 아카이브’를 자랑한다.

슈바르처가 만든 여성주의 잡지 ‘엠마’도 우여곡절 끝에 이 건물에 터를 잡았다. 1977년 창간돼 올해 48돌을 맞은 이 잡지는 한국의 페미니스트 잡지 ‘이프’ 창간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금도 엠마는 격월간으로 발행되며 5만부 발행부수 중 절반은 유료 정기구독자다. 이 잡지는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중시해 광고 의존도를 줄였으며 지금도 재정 독립성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16일 오후 쾰른 ‘여성미디어탑’ 안의 사무실에서 만난 슈바르처는 주름진 얼굴에 미소로 취재진을 맞이했다. 그는 “여러 여성주의 잡지가 명멸했지만 우리는 예외적으로 생존하고 있다. 엠마가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하고 싶은 주장을 맘껏 펼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평생 페미니스트로 살아오면서 나에게는 독립성이 가장 중요했다. 내 생각을 유지하며 살 수 있기 위해서 독립과 자유가 가장 필요한 전제였다.”

유럽의 가장 유명한 원로 페미니스트 중 한명인 슈바르처는 요즘도 사무실에서 현역으로 일하고 있다. 젊은 시절 프랑스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시몬 드 보부아르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슈바르처의 사무실엔 보부아르의 커다란 초상이 걸려 있었다. 슈바르처는 만나자마자 한국 여성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몇년 전부터 한국 여성의 문학을 읽으면서 감탄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전통과 현대적 세계 사이 분열상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한국 여성의 상황은 우리에게도 굉장히 관심거리다.”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과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었다는 그는 “김지영의 경우 그 속에 여성 조상이 들어있고, 한강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급진성에 놀랐다”고 말했다.
엠마야말로 급진적인 매체였다. 성매매 합법화 반대운동, 임신중단 합법화 운동을 벌였고 여성 몸의 상품화, 남성의 성폭력을 비판하면서 50년 동안 논쟁의 중심에 서 왔다. 슈바르처는 이젠 여성들이 스스로 몸을 상품화하는 경향도 있다고 꼬집었다.
“요즘 세상에서 여성들에게는 매끈한 피부, 살 빼기, 식단 같은 것들이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고, 그것이 마치 진보적인 양 말한다.”

그는 한국의 4비(비결혼, 비연애, 비출산, 비섹스) 운동에 대해 웃으면서 “아주 예쁜 도발”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곧이어 “여성은 단일하지 않고, 그것(결혼 연애 출산 섹스)은 여성 각자 개인의 결정”이라고 덧붙였다.
“과거 집단적으로 ‘우리 여성’을 강조하는 일은 여성운동에서 중요했다. 그러나 여성은 집단이면서 또 개인이기도 하다. 출산 파업은 의미 있는 일이겠지만, 나 자신은 출산 파업이 성공할 것이라고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는 가끔 책상을 내리치면서 카리스마 있게 답하곤 했다. “각자의 삶은 프로그램이 아니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여성’은 단일하지 않다는 말과도 같았다.
“‘82년생 김지영’ 또한 그 자신이 여성 소외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가부장제의) 괴로움을 겪었다. 가부장의 문제는 몇천년에 걸쳐 이뤄진 시스템이기 때문에 갑자기 무너뜨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슈바르처는 어려서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정치적으로 강인하고 투쟁적인 사람이었고 할아버지는 보살핌에 관심이 많으면서 자상한 분이었으며 어머니는 남자 같은 성정을 지닌 분이었다”고 했다. 이런 가족환경 속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을 습득했고, 페미니즘을 실천하면서 지향과 자신의 실제 삶에서 갈등을 겪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했다. 그는 젊은 시절 프랑스에서 10년 동안 페미니스트 남성과 살았고 지금은 여성과 함께 살고 있다. “2022년 한국에 초청받아 연설하러 가기로 되었지만 여성과 함께 산다는 이유로 초청이 취소되었다”고도 덧붙였다.
독일에서 슈바르처가 여성과 산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가자전쟁과 트랜스젠더 이슈 등에 대한 그의 주장이 일부 우익 담론과 겹치며 우파 독자들에게 반향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슈바르처는 독일에서 서구 백인 중심의 인종주의자이며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킨 푸틴을 옹호한다고 비난을 받았다.
“모두 사실이 아니다. 나는 인종주의자가 아니며 푸틴을 옹호하지도 않는다. 나는 독일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을 중단해야 한다고 얘기했고, 전쟁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전쟁보다 협상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를 만나기 이틀 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개막 기자회견장에서 독일 여성 작가 노라 하다다가 이스라엘의 “학살”을 언급하면서 독일 언론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을 축소 보도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슈바르처는 오히려 “언론이 팔레스타인의 피해를 충분히 보도하고 있으며, 오히려 여성에 대한 하마스의 폭력을 충분히 보도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홀로코스트 사태를 빚은 독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복수에는 반대하지만 유대인의 생존권, 고향을 가질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내가 비판하는 것은 이슬람이 아니라 여성 혐오적이고 극우적인 ‘정치적 이슬람주의’다.”
한국에서는 페미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과 연대를 표명하고 있다며 이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밝혀달라고 재차 묻자 그는 “가자 지역 팔레스타인 민족과 연대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인질로 삼고 폭력적인 일을 벌이는 것에는 반대한다. 네타냐후에 대해서도 정확히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네타냐후를 비판한다고 해서 이스라엘 전체를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한 자신을 가리켜 트랜스젠더 혐오주의자라는 비난에도 적극 반박했다.
“나는 이미 1983년에 트랜스젠더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으며 트랜스 여성을 ‘사랑하는 자매님들’이라 부르며 연대해왔다. 다만 1980년대에 인구의 0.002%가 트랜스젠더였지만 지금은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수가 서구에서 몇 년 새 급격히 증가했다.”
슈바르처는 “특히 여성 청소년 사이에서 성전환이 시크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성으로서 삶에 불만을 느낀다면 사회적 젠더 역할에 문제제기를 해야 할 것”이라며 “트랜스젠더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이 진짜 성전환을 원하는지 사회적 젠더 역할에 불만이 있는가를 구분해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또한 그가 ‘성별 이분법을 벗어나지 못하는 케케묵은 구식 페미니스트’라는 비난을 받는 이유가 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의 답변은 독일 나치의 만행에 대한 반성, 2차 대전과 동서독 분단, 통일, 유럽의 전쟁과 난민 수용, 트랜스젠더 이슈 등 독일의 복잡한 담론 지형과 페미니스트 사유와 실천의 어려움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전개하고 있는 이슬람의 여성 억압 문화에 대한 지적이 전쟁에 명분을 주거나 트럼프의 반여성주의, 반젠더 정책에 빌미를 주지 않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미국은 정말 여성의 권리에 대해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젠더 문제를 트럼프가 꺼내는 것은 단지 핑계에 불과하고,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가리는 술수에 불과하다.”
내년 2월쯤 슈바르처는 마지막 책을 낼 예정이다. ‘페미니즘의 99가지 개념들’이란 책이라고 했다. 자신의 책에 대해서는 자신감이 있어 보였지만 여성 출판의 미래에 대해선 길게 생각한 뒤 어렵게 답했다.
“(여성주의 출판과 잡지의 미래는) 참 말하기 어려운 문제다. 페미니스트 잡지는 엠마 이외에 찾기 어렵고 책들은 상당히 상업화돼 있고 그저 새로운 현대적 동화를 쓰는 식이 되어버렸다. 나 또한 독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다.”
쾰른/글·사진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이 기사는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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