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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l 1984년 시 전문지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 ‘적막’ 등과 산문집 ‘안녕♡바오’, ‘꽃이 진다 꽃이 핀다’ 등이 있다. 천상병시문학상, 아름다운작가상, 조태일문학상, 임화문학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중학생이 되었다. 도서관이 없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했으니 야호~ 드디어! 입학식이 끝나자마자 찾아갔다. 상업고등학교와 연계된 법성포 중학교 도서관. 상급생들이 신기하다는 듯 되물었다. “동화책이 있냐고? 우리도 그런 책 한번 본 적 없다.” 그랬다. 동화책은커녕 시집 한 권 소설책 한 권도 없는, 취직 시험 준비에 바쁜 앳된 학생들의 주판 놓는 소리가 진동하는, 요즈음 독서실 같은 곳이었다.

허탈감에 빠진 채 2학년이 되었는데 교실 급훈이 이상했다. 보통 교훈이나 급훈은 노력, 봉사, 근면이나 진리, 평화, 자유, 성실, 희생 등등이기 마련인데 “말뿐이고 실천이 없는 사람은 잡초만 무성한 들판과 같다”라니. 가슴에 새겼다. 쉽지 않았다. 살아오는 동안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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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한 시를 투고하고 기다렸다. 전화가 왔다. “나 조태일이라는 사람인데, 보내준 시 봤다.” 그런데 ‘시인 정신’에 대한 산문을 20매 써서 보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인이 되어서 어떤 정신으로 시를 쓰며 영혼은 어디에 두고 살아갈 것인가, 그 각오를 쓰라는 것인데, 벌벌 떨면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불면의 날이 지속되었다. 시를 짓는 일보다도 더 어려웠다. 등단한 후 여쭸다. “선생님, 산문은 실리지 않았네요?” 선생님은 그 무렵 필명을 날리던 모 시인 이야기를 꺼냈다. “그 시인 앞으로 10년 후면 이름도 없어질 것이다.” 예단을 하시며 영혼이 타락해 있다고 말씀하셨다.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시인 정신을, 잠수함 속의 토끼, 깨어 있는 영혼을 가진 시인의 길을 가라며 등을 토닥이셨다. 굳게 잡은 손에 힘주셨다. 섬뜩하게도 10년 후 예언은 정확히 적중했다. 등단 40년, 마음에 북극성이 되어준 뼈에 새긴 글이 있다면, 중학교 2학년 급훈과 선생님의 말씀, 바로 살아 있는 ‘시인 정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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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시인

박남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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