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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안으로 볼 수 없는 완보동물은 무적의 극한 생물이다. 위키미디어커먼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완보동물은 무적의 극한 생물이다. 위키미디어커먼스

‘느리게 걷는다(Tardigrade)’는 뜻의 이름을 가진 동물이 있다. 얼마나 느리면 이름도 ‘완보동물’일까. 완보동물은 짧고 통통한 네 쌍의 다리를 가진 생물로, 현미경을 통해서야 꼬물꼬물 걷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자그마하다. 동물계(Animalia)의 독립된 문(Phylum)인 완보동물문(Tardigrade)에 속하며, 절지동물문(Arthropoda), 연체동물문(Mollusca), 척삭동물문(Chordata)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현재까지 전 세계에 1500종 이상이 보고됐고, 이끼와 낙엽 틈, 담수 웅덩이, 해양 퇴적층, 심지어 극지의 바다 등 다양한 서식지에서 발견된다. 생태계에서는 조류나 세균 등을 갉아먹는 작은 포식자로 부지런히 제 몫을 해 왔지만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은 작은 동물이다 보니 대중의 관심에서는 오랫동안 비켜나 있었다.

그런데 최근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이들의 능력이 잇달아 보고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완보동물의 생존 기술은 말 그대로 ‘극한’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지구의 거친 조건은 물론, 우주 환경에서도 버틴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핵심 전략은 환경 스트레스가 닥쳤을 때, ‘툰(Tun)’이라고 불리는 상태로 들어가 대사를 극단적으로 낮추는 것이다. 머리와 다리를 오므리고 몸을 주름지게 줄이면 표면적과 수분 손실이 줄어들고, 세포 내부에서는 구조를 안정화하는 단백질이 발현된다.

완보동물 그림. 게티이미지뱅크
완보동물 그림. 게티이미지뱅크

2007년 9월 14일, 유럽우주국(ESA)은 특별한 생물 실험을 했다. 러시아의 무인 회수형 우주선인 ‘Foton-M3’에 살아있는 완보동물을 태우고 약 12일간 저지구궤도(250~290㎞)에 올린 뒤, 캡슐 외부 덮개를 열어 우주의 진공, 극저온, 방사선, 자외선에 직접 노출시킨 뒤 회수하는 실험이었다. 강한 우주 방사선에 노출되면 보통의 생물체는 세포 내 DNA가 손상되고 활성산소가 생성되면서 심각한 위험에 빠진다. 하지만 완보동물은 툰 상태로 들어가 신진대사를 극단적으로 낮추며 버텼다. 그 결과, 우주 진공과 방사능에 노출된 후에도 높은 생존율을 유지했으며, 지구에 돌아와 다시 활동을 재개했고 일부에선 번식도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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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노출된 후에도 살아 돌아와 새끼를 키우며 살아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작은 동물의 잠재력을 보여 주기에는 충분했다. 사실 우주에 가기 전부터 이미 학계에서 완보동물의 명성은 자자했다. 완보동물은 건조한 상태가 지속되면 툰 상태로 전환해 앞서 말했듯 머리와 다리를 오므리고 몸을 주름지게 줄여 수분 손실을 최소화한다.

이때의 내구성이 매우 놀라운데, 예를 들어 진완보강에 속하는 매크로바이오투스 옥시덴탈리스(Macrobiotus occidentalis)는 심해 1만 미터에 들어갔을 때 가해지는 수압의 여섯 배인 600메가파스칼(㎫)에서도 95% 이상의 높은 생존율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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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보동물은 움츠릴 줄 아는 지혜가 있다. 위키미디어커먼스
완보동물은 움츠릴 줄 아는 지혜가 있다. 위키미디어커먼스

외부의 자극을 막아주는 물리적인 방어막뿐 아니라 세포 내부에서도 극한에서 버틸 수 있게 도움을 주는 분자적 수준의 물질들이 생성된다. 완보동물에서 특히 많이 발견되는 열가용 무질서 단백질(CAHS/SAHS 등)은 툰 상태에서 세포 구조와 막을 안정화해 보호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스트레스 상황에 처했을 때 생성되는 단백질인 ‘Dsup(Damage suppressor)’은 뉴클레오좀에 결합해 활성산소로부터 DNA를 보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Dsup을 인간 세포에 발현시키는 실험을 해 보니, 방사선에 의한 DNA 손상 지표가 약 40% 감소했다. 완보동물의 적응 비결이 다른 생물의 보호 기술에 응용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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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나온 보고들을 종합해 보면 완보동물은 마치 무적의 극한 생물처럼 보인다. 심해보다 수배 높은 압력을 견디고 우주의 방사선에도 끄떡없다면 지구에 어떤 변화가 생겨도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완보동물이 완전 무적은 아니다. 예컨대 일부 연구에서는 극히 짧은 시간 동안 섭씨 151도 이상을 견딘 사례가 보고되긴 했지만, 노출 시간과 수분 상태에 따라 생존율이 급감한다. 즉, ‘특정한 조건’에서만 가능한 내성이 많다. 따라서 기후 변화로 고온의 빈도와 지속 시간이 늘어나면, 완보동물의 생존에도 위협이 될 수 있다.

완보동물의 생존 전략은 ‘무조건적 강함’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움츠릴 줄 아는 지혜’이다. 활동과 휴면 사이의 균형을 정교하게 조절하며 언제 움츠리고 버텨야 하는지를 잘 알고 살아남는다. 느리게 걷지만 조용히 버티고 있다가, 적당한 때가 되면 몸을 펴고 빠르게 뛰며 세대를 남기는 것. 이것이 완보동물이 지구에서 이제껏 살아남은 비결이 아닐까.

아주 극한의 세계는?

히말라야산맥을 넘는 줄기러기를 아시나요? 영하 272도에서도 죽지 않는 곰벌레는요? 인간은 살 수 없는는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적응하고 살아가는 동물이 많은데요. 여름엔 북극, 겨울엔 남극에서 동물행동을 연구하는 이원영 극지연구소 선임연구원이 지구 끝 경이로운 생물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아주 극한의 세계(https://www.hani.co.kr/arti/SERIES/3304?h=s)에서 만나보세요!

이원영 극지연구소 선임연구원·동물행동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