룽먼의 메시지

룽먼의 메시지

동아시아에서 핵발전소 사회적 논쟁 뜨거운 대만 현지르포 ···
가수·배우 등 주도한 ‘맘 러브스 타이완’ 활동 주목

타이베이·신베이(대만)=글 김성환 기자 · 사진·영상 김명진 기자

대만 달력으로 2월28일은 ‘평화 기념의 날’이다. 1947년 이날, 중국 본토에서 내려온 국민당군이 대만섬에 살던 원주민 1천여명을 학살한 이른바 ‘2·28 사건’을 기리는 날이다. 이날 저녁, 대만 타이베이 중심지인 장제스 중정기념당 앞 광장에는 평화 기념의 날 행사를 위한 무대가 화려하게 설치돼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인파로 가득 찬 곳은 무대 옆 대형 스크린 근처였다.

유명 감독과 작가 등 예술인 주축

“정부로부터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일본 후쿠시마 주민이 눈물을 훔치는 장면이 대형 스크린을 메웠다. 300여명이 모인 거리의 사람들 표정은 진지했다.

후쿠시마 사고 뒤 어린이들의 암 투병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이안 토머스 애시 감독)의 한 장면이었다. 이곳에서는 1년 전부터 매주 금요일에 핵발전소를 주제로 한 문화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지난해 3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2주기를 맞으면서 대만 각지에서 20만 명이 대규모 핵발전소 반대 행진을 벌인 뒤 줄곧 이어져온 행사다.

그동안 행사를 준비한 이들은 반핵 단체가 아닌 대만의 유명 영화감독과 작가 등 예술인이다. 이들은 음악회·영화 상영 등을 통해 시민들에게 핵발전소 정책의 위험성을 설명하고 있었다. “우리는 대만 정부가 펼치고 있는 핵발전소 건설 정책에 대해 매우 걱정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지난해에는 ‘사람이 우선이다’라는 뜻으로 예술인들이 사람 인(人) 자를 만드는 퍼포먼스를 총통부 건물 앞에서 했습니다. 예술가들이 잘할 수 있는 예술활동을 활용해 대중에게 알리는 거죠.” 광장에서 만난 대만의 대표적인 극작가 샤오예는 행사 취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대만은 동아시아에서 핵발전소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가장 뜨거운 나라다. 섬의 절반 이상이 산악지대인 탓에 대만 국민대부분은 섬 동쪽 지역에서 남북에 걸쳐 산다. 도시가 발달하면 발전소가 필요하다.

국민당 군사정부의 이른바 ‘백색공포’가 이뤄지던 1970~80년대 군사정부는 북부 2곳(4기), 남부 1곳(2기)에 핵발전소를 지었다.

그러나 1986년 소련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가 터졌고, 이듬해 대만은 군사정부 계엄령에서 벗어났다. 민주화의 물결이 시작되면서 핵발전소 가동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등장하게 됐다.

핵발전소가 본격적으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건, 정권을 다시 잡은 국민당 정부가 1992년 섬 북동쪽 신베이시 궁랴오군에 룽먼 4호기 핵발전소 건설 계획을 발표하면서부터다. 대학생들과 학자 등으로 구성된 대만환경보호연맹(TEPU)과 여성단체인 대만주부연맹(Alliance for Homemakers)이 중심이 돼 도시와 가깝게 핵발전소를 운영하는 것은 위험하다며 건설 반대 운동을 펼쳐왔다.

핵발전소가 본격적으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건, 정권을 다시 잡은 국민당 정부가
1992년 섬 북동쪽 신베이시 궁랴오군에
룽먼 4호기 핵발전소 건설 계획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지역 택지 농지
1퀸산 1호기604x2기1978~79년
2구오셍 2호기985x2기1981~83년
3마안산 3호기928x2기1984~85년
4룽먼 4호기1300x2기건설중
22년간 반복된 탈핵의 꿈

“예전에는 여기 내려가 밤마다 장어를 잡곤 했는데···. 핵발전소 앞에 방파제가 생기고 나서는 해변 모래가 쓸려 내려갔어요.”

2월27일 오후, 대만 신베이시 궁랴오구 푸룽 해변 앞에 선 우웬창(58)은 해안선 끝을 가리켰다. 파도 너머 희뿌옇게 솟은 굴뚝과 상자를 닮은 건물 두 채가 눈에 들어왔다. 타이베이 시내에서 지우펀을 거쳐 북동쪽으로 1시간 떨어진 이곳 궁랴오에는 룽먼 4호기 핵발전소가 동중국해와 마주 보고 있었다.

1992년 첫 삽을 뜬 룽먼 4호기 핵발전소에는 개량형비등형경수로(ABWR) 2기가 들어선다. 핵분열 과정에서 나온 열로 물을 끓여 터빈을 돌리는 원리로, 국내에 있는 핵발전소와 달리 굴뚝에서 수증기가 나온다.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과 일본 히타치가 만든 이 원자로는 일본 후쿠시마 제1원전에도 사용했던 비등형경수로(BWR)에 안전설계를 보탠 모델이다. 터빈은 일본의 미쓰비시에서 만든다. 그러나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대만전력공사(TPC)는 이 핵발전소에 좀더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1970~80년대 해외 기술로 건설했던 핵발전소 3곳과 달리, 룽먼에서는 대만 자체 기술로 발전소를 조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이곳 주민 상당수는 우려 섞인 표정으로 발전소 건설을 바라보고 있다. 위험한 입지 조건과 사고 가능성, 그리고 건설 과정에서 발생한 잦은 사고 때문이다. 애초에 중화민국 연호인 민국100년(2012년) 완공 계획이던 4호기 핵발전소는 그동안 사업 중단 등을 겪으며 계획을 훌쩍 넘긴 채, 여전히 공사 중이다.

애초에 중화민국 연호인
민국100년(2012년) 완공 계획이던
4호기 핵발전소는 그동안 사업 중단 등을
겪으며 계획을 훌쩍 넘긴 채,
여전히 공사 중이다.
취재진에게 핵발전소 내부 공개

이날 대만전력공사는 <한겨레21>에 원자로가 있는 통제구역을 제외한 핵발전소 내부를 공개했다. 공정률 90%를 넘긴 상태였지만 핵발전소 안 곳곳에서는 작업용 자재가 가득 쌓여 있었다. 건설사무소에서 차를 타고 500m 가까이 들어가니 원자로 건물 외벽이 나타났다. 외벽과 이어지는 변전시설을 손보는 이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각종 자재를 실어나를 트럭이 간간이 지나갔다. 이 핵발전소는 아직 핵연료를 주입하지 않았지만, 가동 전에 각종 시험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왕보허 대만전력공사 룽먼핵발전소 총괄건설부장은 “이번주에 진행해야 할 각종 테스트가 빡빡하다”고 말했다. 옌랴오 마을에 들어선 4호기 핵발전소는 해안가에 바닷물을 끌어올리는 담수시설이 마주 보고 있으며, 원자로 시설은 그 뒤에 물러나 있는 구조다. 발전소를 내려다보는 산등성이에는 송전시설과 함께 냉각용 물탱크가 있었다.

“이곳 주변 35km 안에는 활성단층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중에서도 발전소 부지가 가장 안전한 지역이다.” 건설 사무소에서 만난 대만전력공사 관계자들은 발전소의 입지가 안전하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지진과 쓰나미 등의 사고로 핵발전소가 멈추는 것에 대비해 냉각수 공급 시설을 만들었으며, 과거 쓰나미 통계를 바탕으로 해안가에서 좀더 내륙으로 들어와 발전소를 짓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근에서는 낮은 수준의 쓰나미만 발생했다. 과거 문서를 기준으로 보면 쓰나미가 최고 7.5m 일어나는데, 그보다 더 높은 12m까지 견디는 설계를 했다.”(랴오샤홍 롱먼건설소장) 4호기 핵발전소는 2기의 원자로 가운데 1기만 우선 시험가동을 진행하고 있다.

“공사비로 10조원 쓴 대국민 사기극”

그러나 대만전력공사의 설명과 달리, 마을 주민들은 핵발전소의 안전성에 강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궁랴오구 주민들은 1994년 핵발전소 건설의 찬반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에서 투표자의 96.6%가 ‘건설 반대’ 의사를 밝혔다. 핵발전소 건설에 반대했던 주민들은 ‘옌랴오 반핵 자주회’를 꾸려 정부에 반대 의사를 내비쳤으며, 현재는 ‘대만환경보호연맹(TEPU) 궁랴오 지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부 회장을 맡고 있는 궁랴오 마을 토박이인 우웬창은 “핵발전소가 가진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핵발전소 굴뚝에서 방사성물질이 빠져나오면 주변 하천이 오염될 가능성이 높다. 발전소에서 9km 떨어진 곳에는 타이베이시에서 식수원으로 끌어다 쓰는 댐도 있다.”

더 큰 문제는 핵발전소 사고시 피해 거리를 예측해 미리 대피소나 방호물품 등을 준비하는 기준이 되는 ‘방사선 비상계획구역’(피난구역) 범위가 적다는 점이다. 대만에서는 현재 방사선 비상계획구역은 핵발전소 반경 8km로 정해져 있다. 4호기 핵발전소와 타이베이 도심까지는 40km 거리다.

그는 마을 주민들을 대표해 지난해 4월22일 마잉주 대만 총통을 만났다. 대만 뉴스도 그 만남을 중계했다. “비상계획구역을 30km로 확대해달라는 마을 주민들의 항의 서한을 건네려고 총통을 만났다. 그런데 그 뒤 별다른 답을 듣지 못했다.” 그는 “공사비로 3천억대만달러(약 10조5천억원) 가까이 쓴 4호기 핵발전소 건설은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비판했다.

4호기 핵발전소 가동을 둘러싼 진실게임은 ‘전력예비율’(추가 전력 공급 여력의 수위)을 둘러싼 문제에서도 충돌한다. 환경단체 등에서는 4호기 핵발전소 없이도 전력난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대만환경보호연맹 공동대표인 신민신 전 대만국립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현재 대만에서는 전력 생산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여름과 같이 전력 사용량이 늘어나는 상황에서도 전력예비율이 20% 수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2년 기준으로 전체 전력 가운데 사용되지 않은 전력은 22.7%였다. 같은 해 핵발전소 3곳에서 생산한 전력은 10.6% 수준이었다. 핵발전소 3곳을 닫아도 충분하다는 이유다.” 그는 전체 전력 생산량의 5.6%를 차지하게 될 4호기 핵발전소를 짓는 대신 다른 신재생에너지를 활용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4호기 핵발전소 가동을 둘러싼
진실게임은 ‘전력예비율’(추가
전력 공급 여력의 수위)을 둘러싼
문제에서도 충돌한다. 환경단체
등에서는 4호기 핵발전소 없이도
전력난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대만전력공사 쪽
전망은 다르다.
“전력예비율 때문에 건설 불가피”

그러나 핵발전소 가동을 추진하려는 대만전력공사 쪽 전망은 다르다. 양예신 대만전력공사 핵발전처장은 “예비율이 20% 수준인 것은 맞지만,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감안해 전력예비율을 15% 이상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만전력공사의 내부 보고서도 이같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새로 지은 화력발전소는 최소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국제사회의 경험을 참작해, 우리나라 전력의 예비율을 15%로 계획하며, 이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에서 전기를 끌어올 수 없는) 독립 전력망을 가진 한국과 같은 수준이다. …우리나라 과거 경험 통계를 보면, 전력예비율이 10%보다 낮아지면 전력 부족 위험이 생길 수 있다. 1990~96년 예비율이 7% 이하였는데 ‘전력 총량 제한공급’ 횟수가 43차례에 이르렀고, 1994년에는 16차례여서 산업과 민생에 모두 상당히 큰 충격을 줬다.”

진실게임이 첨예해질수록 멍드는 건 마을 공동체다. 핵발전소 건설을 시작하던 1994년에는 핵발전소 근처에서 마을 주민들이 격렬하게 항의하던 과정에서 지역 경찰이 목숨을 잃는 사고도 있었다(이른바 ‘10·3 사건’). 마을 주민 일부는 범법자가 됐다. 그 뒤로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 핵발전소 반대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대만전력공사에서는 공사 초기 주변 마을에 매달 200kW의 전기를 무료로 공급했다. 이른바 주민 지원책이었다. 그 뒤 150kW로 줄어든 무료 전기 공급은 지난해부터는 끊긴 상태다.

“개미가 고래와 싸우는 거 같아요. 그래도 점점 개미가 많아지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죠. 요즘에는 정보도 발달해서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니 말이죠.” 궁랴오구 푸룽역 앞에서 여름 피서객을 상대로 물놀이용품 가게를 운영하는 양구이잉(70)이 말했다. 그가 핵발전소 건설 반대 운동에 뛰어들었던 건, 정부가 주민들 몰래 건설을 추진했다는 점 때문이다. “마을에 와서 주민들에게 공사에 대해 객관적으로 설명해달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공사를 은밀하게 진행했다. 결국 남은 건, 정치적 문제뿐이다. 이 정부는 자비도 없고 양심도 없다.” 평범한 주민이던 그는 지금도 대만전력공사를 상대로 핵발전소의 안전성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마침 그와 대화를 나누던 중, 대만전력공사 직원이 가게 앞에 큰 서류 상자 3개를 놓고 갔다. “내가 몇 달 전에 대만전력공사에 요구한 시험가동 결과 자료다. 계속 들여다봐야 맞설 수 있으니까.”

대만 인구 4분의 1이 핵발전소 근처 살아

20년 넘게 이어져온 대만에서 핵발전소 반대 운동에 새로운 변화가 생긴 건, 3년 전에 터진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때문이다. 일본과 같은 지진대에 놓인 대만섬에서 느끼는 공포는 훨씬 컸기 때문이다. 그 충격은 반핵운동의 지형도 바꿔놓았다. 좀 더 대중화된 형태로 변했다.

대만 안에서 감지되는 색다른 기류 가운데 대표적인 예는 ‘맘 러브스 타이완’(Mom Loves Taiwan)의 등장이다. 중국어로는 ‘핵발전소를 감독하는 어머니 연맹’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이 단체는 2011년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뒤 생겨났다. 기존 시민사회단체가 아닌 여성 유명인사 250여 명이 모여 만든 이 단체는 인터넷을 중심으로 핵발전소의 위험성을 공부하고 관련 정보를 나누며 대중 캠페인까지 벌이고 있다. 2014년 3월 현재 회원 수가 3만 명을 넘어섰다.

‘맘 러브스 타이완’이 대만
안에서 큰 주목을 받은 건,
대중가수·영화배우·작가·학자·언론인
등 유명인이 처음부터 단체 조직과
활동에 나섰다는 점이다. 국내에서는
쉽게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다.

타이베이시 신이구에 사는 주부 허정춘(38)도 3년 전부터 ‘맘 러브스 타이완’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7살 아들과 5살 딸을 둔 보통 엄마다. “후쿠시마 사고 보름 뒤에 필리핀에서 방사능이 검출됐다는 뉴스를 봤어요. 그 소식을 듣고 놀라서 아이들에게 주려고 다른 엄마들과 함께 (방사능 해독에 도움을 주는 요오드 성분이 든) 김·다시마 등을 잔뜩 사뒀죠.” 2월28일 오후에 만난 그는 “정부는 (후쿠시마 사고 영향력에서) 안전하다고 얘기했지만 엄마 입장에서 보면 가족의 건강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안심이 안 됐다”고 말했다.

그는 간호사 출신이지만, 생소한 방사능 관련 정보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야 했다. ‘맘 러브스 타이완’에 가입한 계기도 방사능 관련 좌담회에 가서 우연히 알게 되면서다. ‘맘 러브스 타이완’ 회원이라고 하지만, 주요 활동은 인터넷 등을 통해 방사능의 위험성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대만 핵발전소의 안전성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한마디로 ‘스터디 모임’에 가깝다.

“대만에 있는 핵발전소 근방 30km에 사는 사람이 600만 명입니다. 대만 인구(2300만명) 가운데 4분의 1에 해당하죠.” “대만은 섬나라니까 태양광이나 해안가에서 풍력을 하면 좋겠어요. 핵발전을 줄이려면 에너지 절약도 필요하죠. 그래서 아이들한테도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틀라고 교육합니다. 후쿠시마 사고처럼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통해 교훈을 얻어야죠.” “한국은 핵발전 비중이 36%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더 핵발전소에 의존하죠. 한국보다 전기가 부족하지 않은 대만에서는 왜 정부가 자꾸 핵발전소를 지으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3년 동안 쌓은 핵발전소 관련 지식을 풀어놓았다.

반핵 깃발을 내건 식당까지 등장

‘맘 러브스 타이완’이 대만 안에서 큰 주목을 받은 건, 대중가수·영화배우·작가·학자·언론인 등 유명인이 처음부터 단체 조직과 활동에 나섰다는 점이다. 국내에서는 쉽게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다. 유명 가수와 배우 등이 참여해 핵발전소의 문제점을 알리는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함께 부르고, 모금을 통해 인터넷과 텔레비전에 핵발전소 관련 정보를 알리는 광고를 만들기도 했다. “우리는 반핵 단체가 아니라 감독 단체입니다. 시민들에게 핵발전소에 대한 정보를 주고, 알 수 있는 기회를 주면서 변화의 영향을 끼치는 걸 목표로 하는 단체고요.”

‘맘 러브스 타이완’의 공동 운영위원 첸아이링 푸본문화재단 이사장이 말했다. 타이베이 번화가인 쑹산구에 있는 그의 재단 사무실은 ‘맘 러브스 타이완’의 사무실로도 쓰이고 있다. 25년 전 <대만텔레비전>(TTV)의 유명한 뉴스 앵커였던 그는 대만 2위의 금융그룹 ‘푸본파이낸셜홀딩스’ 다니엘 차이회장의 부인으로도 알려진 인물이다.

“예전에는 핵발전소 문제를 잘 몰랐습니다. 후쿠시마 사고 당시에도 그저 ‘다른 나라의 일’이라고만 생각했으니까요.” 첸 이사장이 이 활동을 시작한 건, 2011년 연말 모임에서 후쿠시마 사고를 취재했던 대만 기자를 만나면서부터다. “사고가 난 일본의 상황이 대만과 비슷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대만도 정말 조심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죠. 특히 핵발전소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순간은 수명이 거의 다된 핵발전소와 준공을 막 끝낸 핵발전소가 있을 때라고 하더군요. 생각해보니 대만이 바로 그 상황이었습니다.”

그처럼 위험을 공감한 텔레비전 방송 진행자, 영화배우, 가수 등이 한데 모여 기자회견과 언론 인터뷰를 열었다. “핵발전소에 관한 정보를 배우고 정부에 요구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저도 아이 넷의 엄마입니다. 먼저 아이들이 걱정돼요. 뭐가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게 중요한데 우리는 알고 있는게 너무 없었죠. 정부에 세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위험한 핵발전소는 절대 운전해서는 안 된다. 핵발전소 관련 정보를 숨기지 말고 일반인에게 공개하라. 그리고 신재생에너지를 개발하고 연구하라.”

지난 3년 동안 대만에서는 반핵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반핵 깃발을 내건 식당까지 등장했다. “탈핵운동을 모르는 젊은 사람은 반핵 깃발을 마치 유행처럼 받아들이기도 했을 정도니까요.”(허정춘) 그러나 아무리 반핵 정서가 대중적으로 퍼졌다 해도 여전히 핵발전소 논쟁의 해결은 정치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이들의 목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대만의 환경단체인 녹색공민행동(GCAA)의 아이야수 연구원은 “대만 영화관에서는 ‘핵발전소가 필요하다’는 정부 광고가 나온다. 반핵운동에 귀기울이기보다는 광고대행사를 통해 핵발전소의 안전성을 설명하려고 애쓴다. 심지어 한국의 핵발전소 확대 사례를 언급하면서 우리도 따라가야 하며 경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핵발전소 주변에서 그치던 반대의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국민당 정부가 여론전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고 발생하면 아무도 피할 수 없어”

“정부에 대항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저희가 정부를 격려하겠다는 겁니다. 우리는 같은 배를 탔어요. 대만이라는 공간 안에서 위험을 막을 제일 좋은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내가 이기거나 당신이 이기는 문제가 아니라, 같이 이겨야 하는 겁니다.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하면 아무도 피할 수 없을 테니까요.”(첸아이링)

국민투표, 안 맞아~

핵발전소 가동 둘러싼 대만 국민투표 논란 20년사···
시험가동 마치고 상업운전 준비 앞둔 4호기 핵발전소로 충돌예상

고성과 비명이 난무하는 공간에 플라스틱 물병이 날아들었다. 지난해 8월2일 오전, 타이베이 중산구에 있는 대만 입법회 건물(한국의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대만 제1야당인 민주진보당(이하 민진당) 입법위원 40여 명은 이날 새벽 일찌감치 입법회 건물로 모여든 뒤 본회의장 문을 걸어잠갔다. 여당이자 입법회 다수당인 국민당이 1999년부터 신베이시 궁랴오구에 짓고 있는 룽먼 4호기 핵발전소의 가동 여부를 결정하는 국민투표 안건을 단독 처리하겠다고 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의장석을 점거한 민진당 입법위원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4호기 핵발전소 건설을 중단하라”고 외쳤다. 잠긴 출입문을 뚫고 들어온 국민당 위원은 이를 막아선 민진당 위원과 함께 회의장 바닥에 뒤엉켜 굴렀다. 본회의장은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여의도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이날의 촌극은 우리나라 언론에도 소개됐다. 그러나 이날 벌어진 갈등은 그저 흔한 ‘해외 토픽’이라 말하기에는 녹록지 않다. 대만 4호기 핵발전소를 둘러싸고 20년 넘게 이어지고 있던 ‘국민투표’ 갈등이 폭발한 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배를 탔어요. 대만이라는 공간
안에서 위험을 막을 제일 좋은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내가 이기거나
당신이 이기는 문제가 아니라, 같이
이겨야 하는 겁니다.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하면 아무도 피할 수
없을 테니까요.”
2000년 천수이볜 총통의 탈핵 선언

국민투표가 대만 사회에서 뉴스의 중심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건, 1987년 대만에서 계엄령이 해제되면서부터다. 집권세력의 자리를 굳혔던 국민당은 1992년 계엄령 해제 이후 처음으로 핵발전소 건설을 추진했다. 과거 군사정부 시절 핵발전소 건설을 추진했던 것처럼, 4호기 핵발전소 계획도 밀실에서 이뤄졌다.

바뀐 세상에서는 거센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대만 환경단체와 민진당은 도시 밀집 지역과 가까운 거리에 들어서는 4호기 핵발전소의 안전성을 문제 삼았다. 소련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가 벌어진 지 몇년 지나지 않던 상황이었다. 민진당은 더 나아가 “대만 분리독립 여부뿐만 아니라 핵발전소 가동에 대한 찬반 문제도 국민투표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1년에는 시민사회단체가 중심이 된 ‘4호기 핵발전소 국민투표 추진위원회’까지 꾸려졌다.

국민당은 ‘국민투표 여론’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대만전력공사(TPC)는 부지 선정을 끝낸 뒤 1992년부터 4호기 핵발전소 건설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주민투표’로 맞섰다.

1994년 신베이시 궁랴오구를 시작으로 핵발전소와 가까운 지역에 있던 타이베이시·타이베이현·이란현 등에서 4호기 핵발전소 건설의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가 모두 4차례 진행됐고,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당시 법 체계에서는 국민당 정부가 주민투표 결과를 정책에 반영할 법적 근거는 전혀 없었다.

지역명 선거일 투표결과 투표율
궁랴오현1994년 5월 22일건설 반대 96%58%
타이베이현1994년 11월 27일건설 반대 89%18.5%
타이베이시1996년 3월 23일건설 반대 54%59%
이란현1998년 12월 5일건설 반대 64%44%

진통을 빚던 4호기 핵발전소 건설은 2000년 민진당의 천수이볜이 총통에 오르면서 새로운 갈림길에 접어들었다. 그는 공약에 따라 취임 첫해에 4호기 핵발전소 건설을 중단했다. 이미 가동 중이던 3곳의 핵발전소도 점진적으로 폐로하겠다는 사실상 ‘탈핵 선언’을 했다. 국민당과 핵발전 업계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건설에 참여한 미국 GE와 일본 히타치·도시바는 공사비 위약금 소송을 진행하겠다고 했다. 대법원회(한국의 헌법재판소)가 총통의 건설 중단 결정은 위헌이라고 판단하면서, 공사는 이듬해부터 다시 벌어졌다.

그러나 핵발전소 건설 반대 여론은 잠잠해지지 않았다. 천수이볜 총통이 핵발전소 건설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추진하겠다고 선언하자, 당시 입법회 다수당이자 제1야당인 국민당은 2003년 12월 단독으로 국민투표의 절차와 기준을 담은 ‘국민투표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에는 국민투표의 내용은 국가 안보 사안으로 제한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여의도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이날의
촌극은 우리나라 언론에도 소개됐다.
그러나 이날 벌어진 갈등은 그저 흔한
‘해외 토픽’이라 말하기에는 녹록지
않다. 대만 4호기 핵발전소를 둘러싸고
20년 넘게 이어지고 있던 ‘국민투표’
갈등이 폭발한 날이기 때문이다.
10년 만에 국민투표 다시 꺼낸 마잉주

진행 절차도 까다로웠다. 민간 영역에서 투표 발의를 하려면 10만 명의 서명이 필요했다. 그 뒤에는 중앙정부의 투표심의위원회가 타당성 여부를 조사하는 투표 발의 심사를 거치며, 이 과정이 끝나면 전체 유권자의 5%(약 100만 명)가 서명해야 비로소 ‘국민투표’를 진행할 수 있다. 투표가 이뤄진다고 해도 전체 투표율이 50%를 넘어야 유효하며, 이 가운데 절반을 넘긴 내용이 반영된다. 과도하게 복잡한 절차 탓에 결국 국민투표로 핵발전소 문제를 돌파하겠다던 환경단체·민진당의 의도는 물거품이 됐다.

10년 가까이 유명무실했던 국민투표가 논란의 중심으로 다시 떠오르게 된 건, 지난해 국민당 소속 마잉주 총통이 핵발전소 건설·가동 여부를 국민투표로 결정하자고 제안하면서부터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터진 뒤, 대만 사회에서 어느 때보다 핵발전소 가동 중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끊이지 않자 나온 제안이었다. 그는 1년 동안 4호기 핵발전소 건설에 필요한 예산을 동결하겠다고도 밝혔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환영받지 못했다. 핵발전소 가동에 반대하는 이들은, 절차가 복잡한 국민투표를 제안한 것은 6월부터 진행하는 4호기 핵발전소의 시험가동까지 불필요한 사회적 논란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 술수라고 비판했다. 정부가 국민투표에 사용하겠다고 밝힌 질문 내용도 논란이 됐다.

“당신은 4호기 핵발전소가 중단돼야 하며 가동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십니까”라는 질문이 유권자들에게 ‘핵발전소 가동 반대’ 주장이 부정적으로 비칠 만하다는 것이다.

국민투표가 핵발전소에 대한 대만 사회의 여론을 왜곡한다는 지적도 있다. 전체 핵발전소 4곳 가운데 3곳이 대만섬 북쪽에 밀집해 있으며, 나머지 1곳도 섬 남쪽 끝에 있다는 점 때문이다. 핵발전소 30km 일대에 밀집한 타이베이·신베이 등 북쪽 대도시 주민들은 핵발전소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만, 대만섬 중·남부 지역으로 갈수록 핵발전소 문제를 긴박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핵발전소 근처 마을주민들이 “전체 국민이 아닌 지역 주민의 의견을 우선 깊이 반영하라”고 주장하는 이유도 그렇다.

오직 충돌만 남아 있는 상황

국민투표로도 접점을 찾지 못한 대만 핵발전소 건설 논란은 올해를 기점으로 또 다른 길에 접어들고 있다. 4호기 핵발전소가 올해 시험가동을 거친 뒤, 2016년 예정된 상업운전 준비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핵발전소 건설 반대운동을 이끌어 온 대만환경보호연맹(TEPU) 공동대표인 신민신 전 대만국립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건설 중단이) 언제 이뤄질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노력할 뿐이며, 옳다고 생각한 일에 대해서는 끝까지 노력할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노력할 만큼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겠다.” 오래 전 해결책을 놓친 대만 핵발전소 건설 문제에는 오직 충돌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