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와대가 13일 ‘연쇄살인사건 홍보지침’의 존재를 결국 시인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보낸 것”이라는 청와대의 해명은 미흡하기 짝이 없다. 이런 일이 과연 개인적 차원에서 이뤄질 수 있는지, 진상조사는 제대로 된 것인지, 이 지침이 실제 경찰에서 어떻게 활용됐는지 등 의문은 여전한 상태다.
‘위험한 지침’ 윗선 보고 없었다니… 상부 지시 없었나 ‘개인행동’ 납득안돼…작성 경위·배경 철저히 밝혀야
이석현 의원 “서울경찰청 인사청문팀에도 메일 갔다”
‘청와대 연쇄살인사건 홍보지침’ 파문과 관련해 가장 먼저 규명되어야 할 사실은 문제의 메일이 작성된 정확한 경위와 배경이다. 청와대 주장처럼 한 행정관의 ‘개인 판단’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상부 지시’가 개입된 것인지 등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이런 종류의 청와대 지침이 단순히 실무자 개인의 판단에 따라 일선 부처에 내려갔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게다가 메일을 보낸 행정관과 경찰청 홍보담당관은 일면식도 없는 사이라는 게 청와대와 경찰청의 설명이다. 청와대가 보낸 메일은 ‘연쇄살인사건을 촛불 확산 저지용으로 이용하라’는 매우 ‘민감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자칫 큰 파장이 빚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지침’을 아무하고도 상의하지 않고 얼굴도 모르는 경찰 간부에게 전달했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정도의 사안이라면 홍보기획관(수석급)이나 최소한 비서관까지는 사전이든 사후든 보고를 하는 게 통상적인 업무처리 관행이라는 게 청와대 근무 경험자들의 이야기다.
메일이 경찰청 홍보담당관실뿐 아니라 서울경찰청 인사청문회팀에도 보내졌다는 이석현 민주당 의원의 주장에 대해서도 명확한 진상 조사가 필요하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번 사건이 단순히 ‘홍보하는 사람들끼리의 아이디어 교환’ 수준을 벗어나고, 관련자도 훨씬 늘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와대 관계자는 “메일은 경찰청에만 보낸 것으로 안다”고 부인했다.
메일의 내용이 거칠고,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실이 정부기관 홍보담당관들과 직접 접촉하는 부서가 아니란 점에서, 이번 사건의 의미를 낮게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문제의 행정관이 ‘업무실적’을 올리기 위해 ‘오버’하다 빚어진 사고가 아니냐는 얘기다. 하지만 ‘실적 과시’를 위해서였다면, 사후 윗선에 보고도 하지 않고 혼자 비밀로 삼았다는 말이 더욱 믿기 힘들어진다.
권태호 기자 ho@hani.co.kr
청와대 자체 조사내용 ‘알맹이’ 없어책임회피·여론무마 급급
해명 브리핑 1분만에 ‘끝’ 징계도 구두에 그쳐
이번 사건에 대한 청와대의 미심쩍은 태도는 사건의 뒤처리 과정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청와대는 사건의 ‘꼬리 자르기’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러 정황을 살펴볼 때, 청와대는 이 사건이 언론에 본격적으로 다뤄지기 전부터 ‘상황 파악’을 한 것으로 보인다. 김유정 민주당 의원이 경찰청 홍보담당관실에 확인 요청을 한 것이 4일이었다. 따라서 청와대는 최소한 그 시점부터는 사건의 내용 파악에 들어갔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김 의원의 첫 폭로가 나온 11일 “그런 사실이 없다”고 했다가, 12일에는 “‘공식적으로’ 보낸 일이 없다”고 했고, 13일에야 “개인적으로 보냈다”고 말했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이 기간 동안 청와대가 사건 파문의 축소를 위해 움직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실제로 청와대는 메일 발송 사실을 시인한 뒤에도 이번 사건에 대한 자체 조사 경위와 결과에 대한 설명을 회피하고 있다. 청와대는 13일 오후 한 관계자를 내세워 ‘개인적인 행동’이라는 결론과 ‘구두경고’ 조처만 짤막하게 밝혔다.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지만, 그는 “드릴 말씀이 없다”며 답을 피하고 1분여만에 자리를 떴다. 메일을 보낸 이성호 행정관을 비롯해 청와대·경찰청 관련자들에 대한 엄중한 조사가 이뤄진 흔적도 별로 엿보이지 않는다. 결국 이 기간에 청와대가 시간을 최대한 벌면서 사건을 ‘개인적 일탈행위’로 축소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 행정관에 대한 징계가 ‘구두경고’에 그친 것도 문제다. 청와대는 지난해 4월 국정기획수석실 최아무개 행정관이 서상목 전 의원 홈페이지에 서 전 의원을 비판하는 글을 올린 사실이 논란을 빚자, 직위해제한 바 있다. 정권의 도덕성과 신뢰성을 떨어뜨리기로는 이번 사건의 심각성이 훨씬 더한데도, 징계는 더 약한 솜방망이에 그쳤다. 이 행정관이 이기택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의 장남이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권태호 기자 ho@hani.co.kr
경찰 “업무 참고자료로 활용” 모호한 설명 어디까지 전파·실행됐나청와대 지침 받은 홍보담당관 “다른 직원이 보냈는지는 몰라”
청와대의 ‘홍보지침’이 어디까지 하달돼 어떻게 집행됐는지도 밝혀내야 할 대목이다. 박병국 경찰청 홍보담당관은 “문제의 이메일을 지난 3일 받아 업무 참고 자료로만 활용했다”고 밝혔다. 청와대 지침이 경찰 홍보라인을 거쳐, 다시 일선 경찰 쪽에 전달됐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박 홍보담당관은 “청와대에서 보내온 메일에 특이할 만한 내용이 없었고, 군포 연쇄살인사건 피의자가 검찰로 송치돼 사건이 마무리되는 시점이었다”며 “지침에 맞게 내가 적극적으로 움직인 것은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메일 내용을 경기경찰청 등에 전파한 사실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다른 직원들이 보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고 명확한 답변을 피했다. 각 지방경찰청에 홍보 관련 가이드라인 등을 제시하는 게 주 업무인 경찰청 홍보담당관실이 청와대의 ‘지침’을 받고 내부 참고 자료로만 활용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실제 ‘연쇄살인 사건을 적극 활용하라’는 청와대 지침이 ‘집행’된 정황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청와대로부터 메일이 도착한 지난 3일 연쇄살인 사건을 수사한 경기경찰청 수사본부는 ‘범행 과정을 책으로 내어 아들이 인세라도 받게 하겠다’는 피의자 강아무개씨의 발언을 언론에 먼저 소개했다. 현장 취재진이 묻지도 않은 피의자의 발언을 먼저 알려주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또 여느 때와 달리 강씨 검거에 공헌한 범죄심리 분석관과 과학수사 기법 등을 적극 알렸고, 언론은 이를 크게 보도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