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기업 감시·견제 위원에 법·절차 무시 노골적 강요”
지난 23일 오후 서울 홍익대 부근 커피숍에서 만난 박인혜(52·사진) ‘한국 여성의 전화’ 상임대표의 얼굴엔 비장감이 서려 있었다. 박 대표는 1년째 공공기관운영위원회의 민간위원을 맡고 있다가 최근 들어 노골적인 사퇴 압박을 받고 있다. 박 대표는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사퇴를 강요하고 있는 정부가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져온다”고 강조했다. 공공기관운영위는 공기업 임원 인사는 물론 공기업 관련 정부 정책을 심의·의결하는 기구로, 공공서비스를 민간에서 효율적으로 감시하고 견제한다는 뜻으로 지난해 3월 출범했다.
그는 정부 관계자에게 언제부터 사퇴 압박을 받았는냐는 질문에, “두 달 전으로 거슬러 간다. 기획재정부 공공정책국 과장이 일부 민간위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새정부가 민간위원 절반 정도를 새로 선임하려고 하니 사직서를 내라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첫번째 압박은 민간위원들의 거센 반발로 없던 일이 됐다. 하지만 5월 초 배국환 기획재정부 2차관이 민간위원들과 간담회에서 다시 사퇴 건을 거론했고, 14일께부터는 각 민간위원들에게 노골적으로 압박을 가했다. 박 대표에게도 공공정책국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 “재신임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래서 일괄 사표를 받기로 했다”며 사실상 사퇴를 강요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 대표는 사표를 쓰지 않았다. 정당한 절차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 대표가 사퇴를 거부하자, 이번엔 배국환 차관이 지난 23일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여러번 언질을 줬는데 왜 사표를 내지 않느냐고 하더라. 사표 내기 싫다면, 사의를 표명하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현재 사퇴를 거부하고 있는 민간위원들은 박 대표와 이유정 변호사(법무법인 자하연), 윤영진 계명대 교수(행정학) 등 세 명이다. 모두 같은 요구를 받고 있다. 박 대표는 배 차관에게 “법대로 처리해 달라. 다만 공식 정부 문서에 사퇴 요구를 거부했다는 기록을 남겨 달라”고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기관운영위의 운영은 파행을 빚고 있다. 새 정부 들어 단 한번도 본회의가 열리지 않았다. 지난달 22일엔 본회의가 잡혔다가 정부의 공기업 기관장 일괄 사표 제출 방침을 비판한 일부 민간위원의 인터뷰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취소됐다. 본회의 대신 지금껏 두 번의 서면결의만 있었다. 일부 공기업 임원 인사와 보수 등에 관한 안건이었다.
박 대표는 부당한 사퇴 압력보다 공공기관운영위의 파행을 더 우려하고 있다. “임원 인사와 보수 문제는 장시간 토론과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그럼에도 이메일로 안건을 통보한 뒤, 그에 대한 찬성 반대만 통보해 달라고 하더라. 서면결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민간위원이 거수기는 아니지 않나.”
그럼에도 정부가 무리하게 사퇴를 요구하는 이유는 뭘까? “우리 존재 자체가 부담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운영위에서 우리가 이견을 제시하면 논의가 지연되고 이 과정이 언론에 보도되면 정부에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될 수 있다. 공기업 통폐합이나 민영화 등의 사안은 모두 운영위의 심의·의결을 거쳐야 할 사안이다. 이런 사안을 손쉽게 처리하자는 것 아니겠나.”
글 김경락 기자 sp96@hani.co.kr
사진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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