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수다옥 다도. 박미향 기자
회수다옥 다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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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 일과를 마치고 한숨 돌릴 수 있는 작은 틈이 생길 때가 있다. 그때 온종일 쥐고 있던 휴대전화를 소파 구석에 던져놓고 물을 끓인다. 물이 끓는 동안 잔과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다관(찻주전자), 유리잔처럼 생긴 공도배(찻잔마다 다른 차 농도와 맛을 맞추는 다구) 등 다구를 꺼낸다. 보글보글 물방울을 뿜어내며 끓어오른 물을 찻잔과 다관, 공도배에 부어 예열해놓고 오늘 마실 찻잎의 향을 즐긴다. 버석한 찻잎의 모양새도 구경한다. 다구가 충분히 따뜻해지면 예열한 물을 버리고 다관에 찻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차를 우린다.

차는 보통 세번에 걸쳐 우려낸다. 첫번째는 차의 향기를 즐기면 좋다. 버석한 찻잎이 뜨거운 물과 함께 깨어나면서 오랜 시간 동안 품고 있던 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차가 알맞게 우러나면 공도배에 찻물을 남김없이 따른다. 마시기 좋은 온도가 되면 찻잔에 나누어 담아 마신다. 어떤 흙에서 자라나 어떤 바람과 비를 맞았는지 차의 시간을 향으로 짐작해본다. 다 마시면 또다시 뜨거운 물을 다관에 부어 두번째로 우려낸다. 이때 차는 진가를 드러낸다. 한껏 끌어올린 풍부한 향과 맛을 즐긴다. 세번째 우릴 때는 조금씩 옅어지는 차의 색과 향을 기억하려고 애써본다. 이때쯤 되면 차의 따뜻한 기운이 온몸에 퍼지면서 기분 좋은 나른함이 찾아온다.

그렇게 30분 정도 차를 마시고 나면 애쓰지 않아도 천천히 깊게 숨을 쉬는 자신을 발견한다. 차의 향과 맛을 즐기려고 활짝 열어둔 감각이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알려준다. 하는 거라곤 가만히 앉아서 차를 우린 것뿐이지만, 경남 하동이나 대만 해발 2천m의 고산, 중국 윈난성을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고 나면 시끄러운 휴대전화엔 손이 가지 않는다. 고요함이야말로 늦은 저녁에 가장 어울리는 기분이다. 혼자라면 고요해서 좋고, 둘이면 다정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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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좋은 야외에서 즐기면 더 좋은 다도. 오차쿠 제공
해가 좋은 야외에서 즐기면 더 좋은 다도. 오차쿠 제공

차를 마시는 방식, 또는 문화를 일컫는 ‘다도’(茶道)가 최근 젊은 층 사이에서 주목받고 있다. 온라인에서는 다도 관련 콘텐츠가 부쩍 늘고 있고, 찻집에서 열리는 다회나 ‘티 클래스’, 다구 전시회 등 다도 관련 오프라인 행사 참석자의 70% 이상이 2030세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6월4일부터 4일간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국제차문화대전’에도 참석자 절반 이상이 젊은 층이었다.

‘오차쿠’(o_cha_ku)라는 이름으로 유튜브와 블로그, 인스타그램에서 차 관련 콘텐츠를 공개하는 김수진(가명)씨는 이러한 변화를 가장 빠르게 느낀다. “2년 전 처음 유튜브 채널을 시작할 때만 해도 또래인 2030세대가 만드는 차 관련 콘텐츠가 많지 않았어요. 보이차가 쌓여 있는 배경에 한복을 입은 중장년층 위주의 영상이 대부분이었어요. 최근에는 제 채널을 포함해 차를 마시는 일상을 담은 브이로그, 여행 영상, 차담 콘텐츠 등 차 콘텐츠가 많아졌어요. 차를 마시는 문화가 일상 영역으로 다가오는 게 반가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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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차를 마시는 취미는 다가가기 어려운 문화였다. 지켜야 하는 격식이나 규칙이 많을 거라는 지레짐작 때문이었다. 차는 커피와 다르지 않은 기호음료일 뿐이다. 커피 추출기로 커피를 내려 먹는 과정과 비교해봐도 복잡하지 않다. 다양한 산지의 원두와 볶는 방식을 고르며 취향에 맞는 커피를 마실 수 있듯이, 다도 역시 이와 유사하다. 그날의 기분과 상태에 따라 산지와 덖음 방식이 다른 다양한 차를 고르고 마시는 것, 그게 취미 다도의 핵심이다.

전남광주에 위치한 ‘장흥청다원’의 우전. 이십사절기 중 곡우가 오기 전에 채엽한 찻잎으로 만든 녹차. 오차쿠 제공
전남광주에 위치한 ‘장흥청다원’의 우전. 이십사절기 중 곡우가 오기 전에 채엽한 찻잎으로 만든 녹차. 오차쿠 제공

차는 크게 6가지로 분류된다. 녹차와 백차, 황차, 청차(우롱차), 홍차, 흑차(보이차)다. 우리에게 익숙한 녹차는 맑은 녹색 빛을 띠는 신선하고 산뜻한 맛의 차다. 일상에서 자주 마시는 홍차는 완전 발효차로, 진한 풍미가 특징이다. 같은 차라도 계절과 날씨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껴진다. 차의 특징에 따라 자신의 취향을 찾아내거나 새로운 취향을 개발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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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한 단맛이 특징인 백차와 구수한 맛이 좋은 황차는 약발효차에 속한다. 대표적인 백차로는 중국 푸젠성에서 나오는 백모단이 있다. 중국과 대만에서 주로 생산되는 청차(우롱차)는 반발효차다. 묵직하고 깊은 풍미의 철관음이나 부드러운 꽃 향과 단맛이 좋은 동방미인이 여기에 속한다. 보이차는 중국 윈난성의 대표적인 흑차다. 찻잎을 덖고 말린 다음 후발효로 만든 보이차는 천천히 발효시킨 ‘생차’와 강제 발효 공정을 거친 ‘숙차’로 나뉜다. 생차는 숙성도에 따라 부드럽고 깊은 맛이, 숙차는 달고 편안한 맛이 특징이다. 중국과 대만이 잘 알려진 차 생산지이지만, 한국에서도 좋은 차들이 만들어진다. 지리산과 섬진강을 끼고 있는 하동과 전남광주 구례 지역에서 생산되는 발효차는 직접 풍토를 느끼며 마셔볼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요산당’의 2022년산 녹차와 도예 작업실 ‘단장요’를 운영하는 강영준 작가의 백자 다관, 작업실 ‘소요’를 운영하는 박종민 작가의 찻잔. 오차쿠 제공
‘요산당’의 2022년산 녹차와 도예 작업실 ‘단장요’를 운영하는 강영준 작가의 백자 다관, 작업실 ‘소요’를 운영하는 박종민 작가의 찻잔. 오차쿠 제공

차나 다구를 구입하기 전에 다도가 자신과 잘 맞는지 확인해보자. 우선 찻집 방문을 추천한다. 서울 종로구 원서동 창덕궁 옆에 위치한 ‘사모’는 대만 우롱차와 보이차를 다룬다. 예약제로 운영되며 약 2시간 동안 편안하게 차를 마실 수 있다. 인사동의 ‘고전문화’는 무이암차와 보이차 맛이 훌륭한 곳이다. 예스러운 분위기의 찻집이다. 인스타그램으로 다회 공지를 자주 한다. 경기도 안양에 있는 ‘시우티하우스’는 티 코스를 예약제로 운영한다. 차와 다구에 대한 안목을 높일 수 있는 곳이다.

최근 젊은 층이 차를 즐기는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트렌드는 ‘다구’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다구로 찻자리를 만들면 차를 마시는 즐거움이 더 커진다. 다구라고 하면 보통 값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도자기 등을 떠올리지만, 눈을 돌리면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가볍게 즐기고자 한다면 집에 있는 머그잔이나 차 거름망 정도로도 충분하다. 다구에 관심이 생긴다면 다관 등 차를 우릴 수 있는 도구와 우려낸 차를 따라놓는 숙우, 찻잔 등을 준비해보는 것이 좋다.

최근에는 에스엔에스(SNS)나 온라인 쇼핑몰 등을 통해 국내 젊은 공예가들이 빚은 다구를 어렵지 않게 구입할 수 있다. 다구는 자신의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와 모양이 중요하기에 직접 만져보고 구입하는 것을 추천한다. 다구 관련 전시회나 장터가 자주 열리는 이유다. 다구에 관심이 있다면 11월8일까지 서울 용산에 있는 공예용품숍 티더블유엘(TWL)에서 열리는 선물 기획전 ‘공예로 전하는 마음’에 들러보는 건 어떨까. 10월 제주도 서귀포 여행자에겐 도예가 16명의 전시 ‘사적인 찻자리’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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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즐기는 이들은 농담 삼아 자신을 차 자체에 열광하는 ‘차파’인지 차를 마시는 다구에 열광하는 ‘다구파’인지 나눠보곤 한다. ‘오차쿠’ 운영자 김씨는 자신을 ‘다구파’라고 소개한다. “작가의 전시를 보고, 취향에 맞는 다구를 골라 저만의 찻자리를 꾸미는 과정 자체가 엄청난 즐거움이에요. 아름다운 다구를 사용하면 찻자리가 더 풍요로워지죠. 국내 작가 중에서는 ‘무등도요’의 조장현 작가, ‘소요’의 박종민 작가, ‘화개요’의 안상흡 작가, ‘천광요’의 박용태 작가 등을 특히 좋아합니다. 공방 ‘고연산방’의 작품도 좋아해요. 분청, 백자, 청자 등 기법에 따라 빛깔과 형태가 다른데, 여기에 작가만의 색깔이 더해지면 분위기가 또 달라져요.”

다도가 젊어지면서 차를 마시는 시간과 공간도 더 자유로워졌다. 새벽에 요가를 마치고 보이차를 마시기도 하고, 하늘이 잘 보이는 창가에 탁자를 두고 한낮의 햇빛을 즐기면서 가볍게 차를 마시기도 한다. 해 지는 노을이나 달빛을 감상하면서 그날 마신 차의 맛과 향을 적어 내려가며 그날의 기분도 덧붙여 차 일기를 쓰기도 한다. 때론 수련하듯 등을 곧게 펴고 앉아 오롯이 차에만 집중하기도 한다. 여행용 다구 세트도 다양하게 나와 있다. 끓는 물을 보온병에 담아 인근 공원에 가거나 산이나 바다로 여행을 가서 차를 마시기도 한다.

수천년 동안 이어져온 차 문화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새롭게 ‘발견’되는 건 쌓여가는 일상의 자극과 피로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에 가깝다. 타인에게 보여주거나 드러내지 않아도 괜찮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차를 앞에 두고 고리타분한 표현인 ‘차 한잔의 여유’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정의해보는 건 어떨까.

안인용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