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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모병원의 소아혈액종양병동에 있는 ‘라파엘 어린이학교’에서 소아청소년 완화의료 프로그램 중 하나인 미술치료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허윤희 기자
서울성모병원의 소아혈액종양병동에 있는 ‘라파엘 어린이학교’에서 소아청소년 완화의료 프로그램 중 하나인 미술치료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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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영 선생님 보고 싶어요. 빨리 만나요.’

지난해 12월12일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소아혈액종양병동에 있는 ‘라파엘 어린이학교’. 수액줄을 꽂은 박다영(가명·6)양이 카드에 한 글자씩 적어 내려갔다. 다영이는 “어린이집 선생님께 선물할 거야”라며 웃었다. 독한 항암치료 탓에 머리카락이 빠진 다영이는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지난해 7월부터 치료를 받고 있다.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간호하는 엄마 이미진(가명·36)씨는 “온종일 병실에 있으면 애도 저도 답답하다”며 “그림을 그리고, 만들기를 하면서 시간을 채울 수 있으니 너무 좋다”고 했다. 힘든 병원 생활을 버텨가는 모녀에게 잠시 쉴 수 있는 ‘단비’ 같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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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영이는 이날 ‘솔솔바람’의 미술치료 수업에 참여했다. 솔솔바람은 소아청소년과·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회복지사, 미술·음악 치료사, 성직자 등으로 구성된 소아청소년 완화의료팀이다. 2020년 5월부터 운영을 시작했다. 암·희귀질환 등을 앓는 만 24살 이하 소아청소년 환자와 가족이 겪는 심리·사회적 고통을 줄여주고 삶의 질을 높여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미술·음악·놀이 치료와 심리 상담, 임종·사별가족 돌봄 등이 진행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소아 중증 질환의 경우 예후를 예측하기 어려워 진단 시점부터 치료와 함께 완화의료를 권고하고 있다.

미술치료 수업에 참여해 카드를 만드는 백혈병 환우와 보호자. 허윤희 기자
미술치료 수업에 참여해 카드를 만드는 백혈병 환우와 보호자. 허윤희 기자

이연희 서울성모병원 교수(소아청소년과)는 “성인의 경우 말기 암 환자를 대상으로 한 호스피스 인식이 강하지만, 소아청소년 완화의료는 (고통을 줄이는) ‘완화’에 중심을 두고 있다”며 “진단 초기부터 돌봄이 시작된다. 놀이와 미술·음악 치료 등 아이의 발달 단계에 맞춘 접근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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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희 솔솔바람 미술치료사는 “아이 질환으로 가족 모두의 삶에 구멍이 생기고, 한 가족의 일상이 무너지게 된다”며 “완화의료는 그 구멍이 커지지 않도록 지지대를 만들어줄 수 있는 시스템이다. 아이와 가족이 일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백혈병이 완치돼 지난해부터 학교에 다니고 있는 이관우(18)군에겐 완화의료가 힘든 투병을 견디게 한 버팀목이었다. “처음에 ‘내가 왜 아파야 하나’라는 생각에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사람들이 보기 싫어 병실 커튼을 치고 지냈다.” 완화의료팀의 미술치료 수업에 참여하면서 생활의 변화가 생겼다. 관우는 “선생님이 내 그림을 보며 마음을 알아주고 위로해줬다. ‘마음 처방전’을 받은 것 같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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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투병 중인 환자 가족에게도 완화의료는 든든한 존재다. 서울성모병원에서 3년 전부터 완화의료 서비스를 이용 중인 지은숙(49)씨는 “아이의 병이 희귀질환이다 보니 정보가 별로 없어 불안할 때가 많았다”며 “완화의료팀 의사·간호사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어 안심이 됐다”고 했다. 지씨의 아들 은찬(7)이는 24개월 때 극희귀질환인 ‘스미스-킹스모어 증후군’을 진단받아 치료 중이다.

아픈 은찬이가 병원을 무서워하지 않고 ‘따뜻한 공간’으로 느끼게 된 것도 더없이 기쁜 일이라고 했다. 지씨는 “은찬이는 1년에 13번이나 입원을 해야 한다. 병원에 갈 때마다 완화의료 선생님들이 아이를 따뜻하게 맞아줘, 좋은 기억으로 쌓인 것 같다”고 말했다.

백혈병을 앓았던 이관우군이 미술치료를 받으며 그린 ‘따뜻한 손길’이라는 제목의 그림. 관우는 “의사 선생님의 따뜻한 손길에 의지하는 어린 환아의 모습을 그렸다”고 설명했다. 이관우 제공
백혈병을 앓았던 이관우군이 미술치료를 받으며 그린 ‘따뜻한 손길’이라는 제목의 그림. 관우는 “의사 선생님의 따뜻한 손길에 의지하는 어린 환아의 모습을 그렸다”고 설명했다. 이관우 제공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아이를 떠나보내야만 했던 가족들을 위해서도 완화의료는 필요하다. 혈관육종암을 앓았던 아이를 10년 전 잃은 장미숙(가명·54)씨는 아이와 보낸 마지막이 후회로 남는다고 했다. 장씨는 “아이가 갑자기 안 좋아져 코마(의식불명) 상태가 됐다. 의식도 없는 아이 입을 벌려 병원에서 주는 임상 시험약을 욱여넣었다”며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아이가)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이를 행복하게 떠나보냈어’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고 싶다”고 했다.

완화의료는 연명의료 중단 등 마지막 죽음을 어떻게 할 것인지 진지하게 논의할 수 있는 기회도 갖게 한다. 김민선 서울대병원 교수(소아청소년과)와 이정 서울대어린이병원 통합케어센터 교수, 김초희 강원대 교수(간호학) 연구팀의 ‘전문 소아완화의료 효과 분석’(2024년) 보고서를 보면,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서울대어린이병원에서 숨진 만 24살 이하 환자 205명 중 완화의료를 이용한 경우 94.3%가 사전의료계획을 논의한 것으로 조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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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의료계획은 질병이 악화되는 시점에 의료진과 가족이 함께 돌봄 목표나 의학적 처치를 받을 의향 등에 대해 미리 논의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생애 말기 환자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고, 가족에겐 임종을 준비할 시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김민선 교수는 “아이가 사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선 어떤 선택도 쉽지 않고 괴롭다. 그렇지만 사전의료계획을 통해 ‘그 당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을 했다’는 기억은 이후에 남은 가족들에게 작은 위로가 된다”며 “아이의 마지막 시간을 조금 더 의미 있고 풍요롭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