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삐삐언니의 마음책방은?
책을 많이 읽으면 똑똑해지는 것은 확실합니다. 새로 알게 된 것보다 잊어버리는 게 더 많기 때문에 지식 총량이 늘어나는 건 잘 모르겠지만 이해력이 좋아지는 건 분명합니다. 나를 위로하고 타인을 격려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지요. 좀더 씩씩하게 살아가고 싶은 삐삐언니가 책을 통해 마음 근육을 키우는 과정을 여러분과 함께합니다.
재수 없는 말이지만 그냥 입 밖에 내볼게요.
나는 어렸을 때 “우리 애는 공부에 취미가 없어”라고 말하는 어른들이 좀 이상했어요. 자기 애가 성적은 좋지 않아도, 머리가 나쁘진 않다는 것을 에둘러 말하는 거로 들렸어요. 자녀의 지능에 대한 유전적 책임을 미루기 위한 어물쩍 수작으로 느껴졌달까요. 공부가 취미인가? 그럼 공부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건가? 학생이라면 공부는 반드시 해야 하는 건데? 공부는 의무인데?
어른이 되어 일을 시작하고, 다양한 직업과 라이프스타일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과거 학교 공부 좀 했던 나를 기준으로 생각해본다면, 공부를 잘했다고 해서 사리분별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자신과 잘 맞는 파트너를 고르는 선구안이 있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공부가 의무였다면 그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람에겐 대가가 따라야겠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즉, 공부는 취미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럼 일은 어떨까요? 나는 일할 때 꾀부리는 동료들을 ‘뒷담화’할 때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회사가 학교인 줄 아나 보지? 학교는 돈 내고 다니는 거고, 회사는 돈 받고 다니는 거잖아.” 취미가 없으면 공부는 안 해도 되지만, 일은 취미생활이 아니다, 그런 얘기죠.
물론 반격도 가능합니다. 나는 돈 받는 만큼만 일하겠다! 면전에서 그리 말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랬다면 아마 싸늘하게 답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월급 절반만 받으세요.”

그런데, 그런데, 나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기자라는 직업은 나의 중요한 정체성을 형성해왔고, 나는 일에 큰 의미를 두며 삽니다. 또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지요. 하지만 늘 불안해요. 내 자리에서 내 몫 제대로 하고 있나? 밥값 하는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은데? 지금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데!
그런 압박감이 밀려드는 밤엔 가슴을 옥죄는 통증에 잠이 깹니다. 업무 부담에 짓눌려 우울의 하강곡선에서 허우적거리다 일을 제대로 못 마친 적도 있어요. 사회적 자아(일)와 개인적 자아를 분리해야 마음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일에 대해 ‘관조적 자세’를 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일 안한다/못한다는 말은 듣기 싫으니까요. 일 안하는/못하는 사람과 같이 일하는 것도 피하고 싶잖아요.

일을 하는 한 이런 고민에서 벗어날 길 없어 보입니다. 일은 앞가림(생계)의 주전장(主戰場)이자 나를 움직이는 에너지의 원천이자 소진의 원인입니다. ‘번아웃의 종말’(조나단 말레식 지음·송섬별 옮김, 메디치미디어)에 눈이 간 건 진심 궁금해서였습니다. 열심히 일하면서 번아웃을 피할 방법이 있을까? 생선을 먹으려면 가시 씹는 걸 감수하라고 하던데, 일이 무슨 가시제거공장에서 나온 순살생선도 아니고 말야.
이 책을 쓴 조나단 말레식은 미국 킹스칼리지에서 신학을 가르치던 엘리트입니다. 오랫동안 꿈꿨던 대학 종신 교수직을 거머쥐었지만 학생들과 동료들로부터 받는 요구, 스스로를 향한 기대, 잡다한 행정업무에 이리저리 치이며 “삼지창에 찔리는 듯한” 스트레스를 겪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펑! 아무 대책 없이(물론 아내는 돈을 벌어요) 무작정 사표를 던집니다. 번아웃으로 실업자가 되고 나자, 번아웃에 대해 골똘히 연구할 생각이 났나봐요. 말레식은 번아웃은 무엇인지, 번아웃은 왜 발생하는지, 일하면서도 대안적인 삶은 없는지 찾아 나섭니다.
솔직히 말해봅시다. 내가 보기엔 업무 태만인 것 같은데 번아웃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과연 번아웃은 실체가 있는 걸까요? 19세기말 유한계급에 신경쇠약증 만연했던 것처럼(옛날 외국 소설엔 신경쇠약증에 걸린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최근 들어 쉽게 번아웃 딱지를 붙이는 경향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번아웃이라는 용어는 극도로 유명해졌다. 지나치게 막연하게 쓰인 나머지 거의 무의미해졌다”는 회의주의도 나옵니다.

그러나 번아웃으로 교수를 때려치운 저자의 경험으로 보자면, 번아웃은 실제 존재합니다. 기독교 윤리가 어떻게 돈과 일이 존엄하다는 자본주의적 사고 토대를 마련했는지 밝힌(‘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조차도 번아웃으로 무너져 정규직 교수를 그만두고 학계와 느슨하게 연결된 시간강사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번아웃 여부를 살피는 꽤 신뢰 있는 조사기법도 있습니다. 마슬라흐 번아웃 테스트. △일 때문에 정서적으로 고갈되었다고 느낀다(소진 척도) △몇몇 학생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냉소주의 척도) △학생들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나면 활력이 생긴다(개인적 성취감 척도). 이 테스트를 통해 말레식은 ‘진짜 번아웃’으로 분류됩니다.
그럼 번아웃은 왜 발생하는 걸까요? 전세계적으로 보자면 1970년대 이후 계약직·하도급 노동이 확산하고 서비스 업종에서 감정노동이 가중되면서 직장 스트레스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노동환경은 악화하는 반면, 열심히 일하면 좋은 삶을 수 있다는 믿음은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점점 더 멀어지는 두 개의 장대, 즉 이상과 현실”에 올라타고 가랑이가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는 겁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번아웃 증후군이 늘어나는 데는 노동조건은 갈수록 불안정해지는데 일하지 않으면 사회적 루저가 된다는 압력은 더욱 심해지기 때문이겠죠.
현재 시대적 상황이 번아웃이란 흐름을 만들어내는 거라면, 그 조건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번아웃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는 암울한 결론이 도출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번아웃의 구조가 막강하다고 하더라도 ‘틈새’는 있기 마련이지요. 지은이가 발굴한 대안적 사례는 이런 것들입니다. 기도에 헌신하는 삶이란 절대 명제를 지키기 위해 일하는 시간을 강제로 줄이거나, 아무리 노쇠해지더라도 죽는 날까지 적합한 일을 부여하는(마지막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일을 맡게 됩니다) 수도회, 동료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첫번째 가치로 삼는 비영리 기업, 운동 및 취미활동에 열정을 쏟아붓는 사람들, 질병 및 장애 때문에 부득이하게 일을 줄이고 대신 예술적 작업을 통해 존엄성을 되찾은 사람들….
어때요? 좋은 삶이긴 한 것 같은데 당장 나의 일상과는 번지수가 틀린 것 같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저자 또한 뚜렷한 대안을 찾은 것 같진 않아요. 그러나 “쉽게 얻는 해답은 질문마저 잊게”(시와 ‘너무 쉬운’)하니, 우리는 이 질문을 늘 기억하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번아웃에 빠지지 않고 즐겁게 일하는 방법이 있을까, 라는 물음말입니다.
완벽한 정답은 아니지만 서문에서 실마리를 찾아보겠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한 고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고통을 누그러뜨릴 수는 있다. 번아웃은 조직 사회의 현실과 우리의 이상 사이 모순에서 발생하는 한편으로, 일터에서 이루는 건강하지 못한 대인관계의 산물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요구를 하고 그만큼 타인을 인정해주지 않을 때, 우리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 번아웃이 발생한다. 결국 번아웃은 궁극적으로 상대방의 인간적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은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질문은 단순히 ‘내가 번아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당신의 번아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답 안에, 더 나은 일터를 만드는 방법뿐만 아니라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까지 담기게 될 것이다.”
어떤가요? 너무 착한 결론이라서 실망스러우신가요? 하지만 주위를 돌아봐야 한다는 건 만고의 진리입니다. 우리 삶의 목표가 좋은 노동자가 아니라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면.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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