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속 쓸 사람.'(현진의 ‘브런치’ 발췌) 작가로 살고 싶던 서른 살 박현진의 자기소개는 이 문장 하나로 충분했다. 글쓰기 플랫폼인 ‘브런치’에 적은 자기 소개대로, 현진은 꾸준히 글을 썼다. 7년 동안 브런치에 올린 글만 125편. 계속 쓰겠다는 그의 다짐은 2022년 10월에서 멈췄다.
현진은 어려서부터 새로운 것을 배우기 좋아했다. 수영과 클라이밍, 서핑 등 몸을 쓰는 활동과 영어, 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등 새로운 언어도 배웠다. 엑스트라로 독립영화에 출연하고, 밴드에서도 활동했다. 가장 좋아한 것은 책이었다. 방 한쪽 벽면엔 책이 가득했다. “문학으로 등단하는 게 가장 큰 꿈이었어요.” 동생 은진(29)씨의 말이다.

그는 어릴 적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성적인데다 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스로 이름을 지었다. 그는 ‘아힌'이었다가 ‘옥남'이었고 ‘현희'였다. 작가로 활동할 땐 ‘박힌'이라는 이름을 썼다. 나중에 커서는 자신의 한자 이름 뜻(어질 현에 보배 진)이 꽤나 좋아졌다.
“왜? 이건 왜 이렇게 된 거야?” 질문을 달고 사는 현진을 은진씨는 ‘물음표 살인마’라고 불렀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궁금해하던 현진은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자기 뜻과 맞지 않던 직장을 다니면서도 책을 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뜻이 맞는 이들과 모여 독립출판사를 차리고 책도 두 권 출간했다.
내성적이던 동생과 달리 현진은 성격이 밝았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한번은 제가 영화 작업을 하면서 현진에게 히스테리를 심하게 부린 적이 있어요. 불면증도 심했거든요. 그런데 현진이 하는 말이 주체할 수 없는 제 모습이 너무 슬퍼서 속상하다는 거예요. 정말 이타적이라고 느꼈어요.” 현진과 가깝게 지낸 최진영 영화감독의 기억이다.
밖에서 현진은 ‘청각적 감각’이 좋은 사람이었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잘 이해해주는 동생 앞에서는 달랐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닫혀 있는 동생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돼?” 현진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늘 은진씨 옆에 누워 그날 일을 조잘조잘 이야기했다. 모든 힘든 감정을 털어놓은 현진은 언제 기분이 안 좋았냐는 듯 은진씨에게 뽀뽀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현진은 영상디자인 관련 일을 하는 동생을 위해 2022년 11월 첫 주말 사진전 예약을 해놨다. “스위스대사관에서 사진전을 한다고 하던데 가서 사진도 찍고 구경도 하고 오자.”


은진씨와의 약속을 일주일 앞둔 10월29일. 현진은 원래 친구들과 홍대 인근에서 만나기로 했다. 핼러윈을 앞두고 마음이 바뀌었다. 현진은 핼러윈 때의 이태원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날 아침, 현진은 이태원에 간다고 말했다. 남자친구와 상암동 하늘공원에 가기로 했던 은진씨도 마음을 바꿔 이태원에 가기로 했다. 현진의 핼러윈 단장을 은진씨가 해줬다. 준비한 옷이 너무 얇아 자신의 카디건도 빌려줬다. 그리고 함께 집을 나섰다. 은진씨는 현진의 친구들이 있는 한남동까지 함께 갔다.
그 뒤 헤어져 남자친구와 밥을 먹은 은진씨는 저녁 8시30분께 해밀톤호텔 뒤편, 세계음식거리로 향했다. 거리에 들어선 뒤 어느 지점부터 움직일 수 없었다. 발을 쉴 새 없이 밟히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렇게 30분 만에 겨우 빠져나왔다. 이때까지 현진은 세계음식거리 반대편인 퀴논거리에 있었다. 인파를 피해 반대편으로 넘어온 은진씨는 밤 9시가 넘어 현진을 만났다.
현진의 얼굴은 설렘과 흥미로 가득 차 있었다. 은진씨를 붙들고 현진은 자신이 본 재미있는 핼러윈 복장에 관해 얘기했다. 은진씨는 해밀톤호텔 뒷골목에 사람이 많다고 얘기해줬다. 그리고 현진과 친구들의 사진을 찍어줬다. 그때가 밤 9시28분이었다. “재밌게 놀고, 조심해. 이따 집에서 보자.”
이후 현진의 행적을 유가족은 알지 못한다. 함께 있던 현진의 친구들도 모두 세상을 떠났다. 현진의 휴대전화 마지막 기록은 밤 9시38분 지인과의 통화였다. 당시 현진은 녹사평역 앞 공원에 있었다고 한다. “메인 거리(세계음식거리)에 있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 했다더라고요.”(동생 은진씨)
가족은 그날 밤 뉴스로 이태원 참사 소식을 알게 됐다. 은진씨는 서울역 인근에 있다가 엄마의 연락을 받고 집으로 갔다. 현진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은진씨는 미친 듯이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에스엔에스(SNS) 관련 게시물과 모자이크 없이 올라오는 영상들을 3초마다 새로고침 하면서 봤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한 게시물 속에서 현진과 함께 있던 친구의 옷차림을 한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새벽 3시30분이었다. 무작정 순천향대병원으로 향했다. 그 뒤 오전 11시30분에야, 현진이 경기도 고양시 일산 동국대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정신없던 와중에도 은진씨는 또렷하게 기억한다. 경찰관이 마약 이야기를 꺼내며 부검하겠냐고 물었다. 너무 어이없어서 “아니요”라고 했다. 그 뒤에도, 이해되지 않는 것은 많았다.
아빠 박경남씨는 참사 한 달이 지나서야 은진씨와 함께 이태원 골목을 찾았다. 골목길을 찬찬히 돌아보던 경남씨는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아서 딸이 죗값을 받았나보다”라고 말했다. 은진씨는 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골목이 어땠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2년 전, 은진씨는 현진과 죽음에 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비해서, 서로의 휴대전화 비밀번호를 공유하자고 했다. 지금 은진씨는 매일 현진의 휴대전화를 들고 다닌다. 현진의 휴대전화엔 수많은 일기와 생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현진이 보고 싶을 때 은진씨는 천천히 그가 남긴 기록을 들여다본다. 외출할 때면 현진의 옷이나 물건을 한 개 이상 꼭 챙겨서 나간다.
기록하기를 좋아하던 현진은 손으로도 많은 일기를 썼다. 2022년 10월25일, 현진이 손으로 써서 남긴 가장 마지막 일기엔 “요즘처럼만 지낸다면 살아갈 만하다. 행복하다. 요즘 사는 것에 만족한다”고 적혀 있었다.
현진은 2016년 4월 쓴 ‘꽃의 생 그리고 삶’이라는 글에서 삶을 꽃에 비유했다. ‘피어나고 지는 것, 개화와 낙화. 이 아름다운 순환은 사실 우리의 삶과도 같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생에서는 알 수 없는 곳에서 또 다른 탄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 다른 생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생을 활짝 피우다 그렇게 낙화하는 것이다.' 1992년 7월14일 태어나 이번 생이 마지막인 것처럼 배우고, 읽고, 쓰고, 도전했던 현진은 2022년 10월, 이태원에서 낙화했다.

류석우 <한겨레21> 기자 raint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