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들이 속삭인다─팩션 열풍과 스토리텔링의 역사>
<역사들이 속삭인다─팩션 열풍과 스토리텔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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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송 월화 사극 <기황후>가 역사를 왜곡했다는 이유로 논란이 됐습니다. 실존 인물 기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무척 부정적이지만 드라마에서는 그를 ‘이국의 왕실에서 고려의 긍지를 지키며 사랑과 정치적 이상을 실현한 카리스마 있는 인물’로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기황후>처럼 역사적 사실(fact)에 문학적 상상력(fiction)을 더한 장르를 두고 ‘팩션’(Faction)이라 부릅니다. 팩션 글쓰기 기법은 소설,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됩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에게 인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웅이 아닌 인간 이순신의 갈등과 고뇌를 그린 소설 <칼의 노래>, ‘화랑세기’에 기록된 신비의 여인 미실을 현재에 맞게 되살린 <미실>,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 후손까지 두었고,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처럼 죽었지만 교회가 이를 숨겼다는 내용으로 논란을 빚은 <다빈치 코드> 등은 큰 주목을 받은 대표적인 팩션 소설입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왕의 남자>와 드라마 <선덕여왕>, <뿌리깊은 나무>, <불멸의 이순신> 등도 팩션 기법이 들어간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팩션’이라고 하면 1980년 발표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2003년에 출간된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등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세계 최초의 팩션은 1966년에 출간된 소설 <인 콜드 블러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은 1959년 캔자스주의 조용하고 작은 동네 홀컴에서 일어난 일가족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두 살인자와 작은 마을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저널리즘 글쓰기 방법과 소설 작법을 동시에 적용하면서 ‘논픽션 노블’ 또는 ‘세계 최초의 팩션’으로 불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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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콜드 블러드>가 탄생한 1966년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예사조가 대두하던 시기였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목받던 시대에는 절대적인 진리를 부인하고,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해 바라보던 시각 등을 부정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또 그동안 소외됐던 주변 문화에 대한 재조명 등도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이는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사실주의 사조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사실 서술과 묘사를 중시하던 것과는 다릅니다. 역사책에 쓰인 기록 등이 리얼리즘 사조의 특징을 드러낸다면 팩션 기법을 활용해 쓴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등은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의 특징과 유사한 경향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팩션은 역사에 가상 이야기 붙여
재미있는 콘텐츠로 재구성한 것
역사적 비주류 인물 재인식하고
다른 관점서 보는 좋은 기회이죠
하지만 사실로 믿는 사람들 많아
역사왜곡 논란 끊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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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이 사람들에게 인기를 끄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팩션이 기본적으로 다른 콘텐츠보다 재미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역사책에 기록된 역사는 실재했던 사건들을 병렬하지만 팩션은 역사적 사실을 놓고 거기에 스토리를 가미합니다. 실재했던 역사에 처음, 시작, 중간, 끝 등 플롯에 기반한 이야기 얼개를 짜서 흥미를 더합니다.

팩션 기법으로 쓴 소설, 드라마, 영화 대본 등은 기존 역사적 권위에 도전하거나 권위를 부정하는 이야기를 담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존 역사책을 통해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권력이나 권위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도 팩션은 매력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왕위를 둘러싼 권력 다툼과 붕당정치로 혼란이 극에 달한 광해군 8년. 광해군이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고, 허균이 기방의 취객들 사이에서 걸쭉한 만담으로 인기를 끌던 하선에게 광해군을 대신해 왕의 대역을 맡을 것을 명한다는 내용의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이 영화 스토리를 통해 사람들은 왕이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되는 천민이 왕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색다른 재미를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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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은 역사에 상상력을 더하면서 역사책이 주목하지 않았던 비주류 인물들의 역사까지 알게 된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오는 미실, 비담은 실제 역사책에서는 크게 언급되지 않는 비주류 인물이지만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주류 인물로 떠오른 대표적인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팩션은 늘 논란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시청자들은 팩션 기법을 활용한 사극에 열광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역사 왜곡’ 문제를 지적합니다. 에스비에스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는 역사책에서 악녀의 대명사였던 장희빈을 매혹적이고 당찬 여인으로 그려내 지나친 미화를 했다는 질타를 받았습니다. 또 소설 <다빈치 코드>의 경우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그려 기독교도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런 논란이 일 때마다 팩션 작품을 만들어낸 창작자들은 “이건 역사에 상상을 더해 쓴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단지 소설, 드라마, 영화일 뿐인 이 작품들이 자꾸 논란의 중심에 서는 이유는 대중들이 작품 속 이야기를 사실로 믿을 여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사책에 기록된 것 자체도 ‘사실’이라고 단정하기는 힘듭니다. 역사는 흔히 ‘이긴 자들의 기록’이라고 불립니다. 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은 역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인데 이들은 대체로 힘을 갖고 있고,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지배계층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 배경에서 역사책은 그것을 쓴 누군가의 이해관계와 논리대로 정리됐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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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 등 역사를 왜곡했다는 이유로 논란이 됐던 교학사 교과서 사태도 이 문제와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교학사 교과서 논란이 불거지자 보수 진영에서는 “국정 교과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국정 교과서는 정부가 집필진을 직접 선정하고 내용을 감수하는 식으로 만들어집니다. 검정 교과서는 민간 출판사가 집필진을 섭외해 교과서를 만들고 정부의 심사를 받는 식, 인정 교과서는 시·도 교육감의 인정을 받는 식으로 만들어집니다.

보수 진영이 국정 교과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건 결국 권력을 잡은 정권의 입맛대로 역사를 기술하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실제 지난 1974년, 박정희 정부는 검인정 교과서였던 국사 교과서를 국정 교과서로 전환해 유신 정권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새마을운동 등 정부의 정책을 선전한 바 있습니다. 과거에 나왔던 국정 교과서들은 당시 정권의 입맛에 따라 역사적 사실을 다르게 기록했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놓고 보면 객관적이고, 100% 사실만을 기록한 역사는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교과서 펼쳐보기 |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 ‘역사’라는 말

우리는 역사가가 수많은 과거의 사실 가운데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선택하여 이를 기록한 사실을 배운다. 그러므로 역사란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과 ‘과거 사실에 대한 기록’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 과거의 사실 자체는 이미 지나간 일이므로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록하는 사람의 가치관이나 시대에 따라 역사는 다르게 기록될 수 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중학교 역사 1>, 천재교육, 12쪽)

책으로 확장하기 | 역사에 상상력을 허하라

역사가가 과거로부터 어떤 사실을 발견해 그것을 바탕으로 역사책을 썼다면 그것도 100% 사실일 수 없습니다. 역사가가 자신도 모르게 역사책에 자신의 시각을 담았을 확률도 있습니다. 때론 역사가가 의도를 갖고 자신의 사관에 불리한 사실들을 빼고 기록할 수도 있습니다.

<역사들이 속삭인다─팩션 열풍과 스토리텔링의 역사>의 저자인 김기봉 교수는 “역사를 놓고 그것이 사실이냐 허구냐, 사실이냐 아니냐를 이분법적으로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논의”라고 말합니다. 그는 “역사적 진실이란 허구를 배제한 100% 사실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내용이 허구의 그릇에 담김으로써 의미 있게 소통되는 이야기”라고 강조합니다. 저자는 우리 시대 역사신드롬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다름 아닌 ‘이야기에 대한 열망’ 때문이라며 “팩션시대, ‘꿈꾸는 역사’를 허(許)하라”고 말합니다.

논제로 정리하기 | 역사 드라마를 둘러싼 대립

인하대학교 2010년 수시 논술에서는 ‘역사 드라마에 대해 다음과 같은 두 주장(‘갑’과 ‘을’)이 있다. 둘 중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글을 ‘조건’에 따라 작성하라’는 논제가 주어졌습니다.

갑의 주장은 “역사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기록에 생략되어 있는 부분을 상상력으로 메울 수는 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임의로 변형하는 것은 시청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을의 주장은 “역사 드라마의 기록 중 역사적 기록과 어긋나는 부분은 역사 왜곡이 아니라 가치 있는 창작으로 봐야 하며 그것 자체로 시청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겁니다.

이 문제는 두 의견 가운데 한쪽의 입장을 골라 제시된 다섯개의 지문 가운데 한 지문의 사례를 활용하고, 나머지 네개 지문 가운데 하나에서 근거를 찾아 글을 쓰라는 논제로 역사와 문학의 본질적 특성에 관한 서로 다른 견해를 보여줍니다.

김청연 기자 carax3@hanedu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