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에서 배운 ‘객관식 민주주의’ 뒤로하고
경험·이론으로 무장한채 거침없는 난상토론
대회 치르며 ‘절차적 민주주의’ 덤으로 배워
“최근 친노신당을 만들겠다는 논의가 활발한데 이 역시 정책이 아닌 인물에 기대는 구태라고 봅니다.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친박연대라는 게 국회에 있다는 것도 말이 안 돼요.”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으로 고용의 유연화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만드는 유연화가 아니라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긍정적인 의미의 유연화입니다.”
핀란드 교육, 적하효과(Trickle-down effect), 생산적 복지, 아테네 직접민주주의 등 고급 개념들이 거침없이 쏟아진다. 정치와 경제, 교육과 문화를 넘나드는 치열한 논쟁이 이어진다. 마름모꼴로 마주 앉아 토론 상대를 날카롭게 응시하는 이들은 국회의원이나 교수들이 아니다. 대한민국 ‘고딩’들이다.
지난 7월28일 부산시학생교육원에서는 ‘제10회 전국청소년논술토론한마당(논토)’ 본선 토론이 한창이었다. 논토는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행사로 2000년 첫 대회를 시작으로 올해 10회를 맞았다. 이날은 예선을 통과한 63명의 개인 참가자들이 8명씩 여덟 모둠으로 나뉘어 각 방에서 토론을 벌였다. 여기서 16명이 뽑혀 다음날 최종결선에 올랐다.
이번 논토가 특별한 이유는 ‘부마민주항쟁 30년, 한국의 민주주의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주제 때문이다. 이번 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장준호 학장중(부산) 교사는 “1차 예선에 논술문을 제출한 학생들이 예년보다 30% 정도 늘었다”며 “촛불시위 등을 통해 민주주의를 직접 경험했다고 여기는 학생들이 많았고 따라서 여느 주제보다 자신감을 갖고 쉽게 접근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번에 접수된 논술문은 이론이나 논거를 제시한 논문 형태의 글보다 직접 경험하고 체험한 내용에 대한 수필이나 소설 등이 많았다는 후문이다. 박성하(부천 상동고 3학년)군은 담임교사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빗댄 시나리오를 작성해 냈다. “담임선생님은 학생 인권에 관심도 많고 그래서 늘 저희를 존중해 주셨어요. 평소에도 보충수업이나 야자는 우리 자율에 맡긴다는 게 그분 뜻이었거든요. 그랬던 분이 방학 보충수업을 강제로 시키셨어요. 위선자다, 이율배반적이다 친구들끼리 크게 실망했죠.” 도덕성을 생명처럼 여기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결국 비리 혐의로 여론의 지탄을 받은 근래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데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다.
이처럼 학생들은 대회를 준비하면서 교과서에서 배운 민주주의를 역사와 현실에서 다시 발견했다. 지난해에도 이 대회에 참여했다는 이채경(부산국제외고 3학년)양은 1년 사이에 부쩍 큰 자신이 대견하다고 했다. “사실 저는 촛불집회에 부정적이었어요. 제가 참여했던 촛불집회에서는 분명 평화집회를 폭력시위로 선동하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민주주의라는 주제 때문에 근현대사를 제대로 공부하면서 그런 집단행동이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일정 부분 기여한 바가 있다는 것을 알았죠. 물론 아직 촛불집회를 완전히 지지하는 것은 아니에요.”
민주주의의 내용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적 태도를 배운 것도 소득이다. 김경민(부산 동성고 1학년)군은 “원래 조중동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대회 준비하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신문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며 “그러면서 무조건 시비를 가리지 않고 다른 주장이나 의견도 타당할 수 있음을 배운 것 같다”고 말했다. 이처럼 학생들한테 민주주의는 특정 정당이나 정파를 지지하는 ‘정치’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극심한 좌·우, 진보·보수의 대결 속에서 자기만의 무게중심을 찾고 민주적인 삶의 방식을 익히는 일이다.
대회를 치르는 과정 역시 곧 민주주의를 학습하는 과정이나 다름없다. 특히 심사위원들의 구실이 크다. 담론 수준에 머무르기 쉬운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길잡이가 되는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증세냐, 감세냐?’를 놓고 벌어진 토론의 현장에서 학생들이 논문이나 신문기사에 나온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읊었을 때 심사위원이 던진 질문이 그렇다. “여러분 용돈이 10만원인데, 한달에 1만원씩 학급비로 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달부터 3만원으로 학급비를 올린다는 거예요. 학급비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친구들을 돕거나 학급의 기타 운영비로 쓰여요. 여러분은 3만원을 내겠습니까?”
남의 의견이 아니라 자기 의견과 판단이 필요한 질문에 부닥친 학생들은 스스로 답을 찾아 나간다. 이가연(인천 연수여고 3학년)양은 “내가 3만원을 냈을 때 그 돈이 정말 어려운 친구들을 돕는 데 쓰인다는 확신이나 신뢰가 있으면 기꺼이 내겠지만, 돈을 거두고 분배하는 담임선생님이나 시스템을 신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김지연(경기 이우고 2학년)양은 “이가연 토론자의 접근이 증세론을 강조하는 데 필요한 강력한 논거가 될 것 같다”며 맞장구를 쳤다. 학생들이 자기 의견을 찾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이 대회의 심사위원은 ‘평가자’라기보다는 ‘교육자’에 가까웠다.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우는 학생들은 하나같이 들떠 있었다. 김기천(인천 효성고 2학년)군은 “원래는 스펙을 쌓으려고 참가했는데 여기는 분위기가 정말 다르다”며 “대회를 준비할 때보다 참가하면서 배우는 게 더 많은 것 같고 참가자들 사이에도 진정한 유대감이 생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채경양은 “우리나라에서 선거날이 휴가날이 되는 것은 결국 학교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학교에도 이렇게 민주주의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들이 많으면 학교도, 사회도 많이 달라질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배우고 깨치는 기회는 대회에 참가하는 소수의 학생만이 누린 ‘특권’이었다. 이번 대회 논제를 출제하고 기획위원으로 참여한 강화정 금정여고(부산) 교사는 “학교에서 민주주의의 역사를 배운 뒤에 학교는 민주적인가라고 물으면 ‘예’라고 답하는 학생이 하나도 없다”며 “비민주적인 학교에서 가르치는 민주주의를 학생들이 제대로 학습할 리 없다”고 말했다. 이 대회를 만들고 10년째 기획위원을 하는 김주원 양주중(경남 양산) 교사도 “지금 아이들이 배우는 민주주의는 오지선다 시험에서 답을 찾는 수준의 이해일 뿐 살아 있는 지식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민주 시민 양성’은 우리나라 교육과정의 목표다. 이 대회가 학교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민주주의 교육의 본보기가 되는 이유다.
글·사진 진명선 기자 edu@hani.co.kr 김다영(부산국제고 2학년), 이유진(부산 백양고 2학년) 장한슬(부산 동백중 3학년) 아하!한겨레 학생기자
‘소통의 장’ 만든 결선 토론 엿보기“촛불집회, 직접민주주의 길터” 토론자, 옹호하는 주장에 “군중심리에 휩쓸린 사람 많아” 반대 의견으로 대립구도“토론자, 주장 기준 밝혀달라” 질문자들도 공방 거들어
“광우병, 미디어법 등의 사건을 통해 국민들이 광장 정치의 주체가 됨으로써 촛불집회가 직접민주주의로의 길을 텄다고 봅니다. 따라서 촛불집회는 국민들이 정치적 무관심에서 벗어나 참여를 통해 정부와 의사소통을 하도록 이끌었기에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토론자가 전소현(부산 영도여고 2학년)양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유태관(서울 구정고 2학년)군이 입을 열었다. “촛불집회는 소통보다는 대립의 구도로 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뚜렷한 가치관 없이 군중 심리에 휩쓸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문제입니다. 촛불집회 자체의 의의는 좋으나 폭력이 난무하는 촛불집회는 이미 의의를 상실했다고 봅니다.” 토론은 다시 평행선을 달렸다. 지난 7월 29일, 부산 민주공원 중극장에서 ‘제10회 전국청소년논술토론한마당’의 하이라이트인 결선대회의 모습이다.
진시원 부산대 교수의 사회로 시작된 결선대회는 토론 초반부터 날이 바짝 선 언어의 전쟁이었다. 결선대회에 오른 8명(유태관, 김현영, 이현주, 이한주, 김동수, 이미리, 전소현, 이가연)은 예선과 본선을 거친 ‘토론의 귀재’라 할 만했다.

결선 토론의 가장 뜨거운 주제는 ‘촛불 집회’였다. 특히 촛불집회에 청소년들이 참여한 것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유태관군은 “현재 청소년들이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미디어를 맹신할 뿐, 뚜렷한 주장과 근거를 가지고 참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김현영(서울 신현고 2학년)양 역시 “청소년의 참여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촛불집회에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방송, 언론 등의 영향으로 치우친 의견이나 왜곡된 사실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명확하지 않은 주장과 근거를 동반한 참여는 자칫하면 중우정치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며 한계를 지적했다.
반면 이현주양은 “촛불집회에 참여함으로써 청소년들의 의견이 묵살되지 않고 주체적으로 여론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청소년의 정치문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입장이었다. 전소현양은 “나 또한 집회에 참가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나의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었다”며 옹호했다. 이가연(인천 연수여고 3학년)양은 “나이와 성숙도가 비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번, 두번 참여하면서 전문 지식이나 자료를 찾아보면서 공부도 하고, 집회 참가 학생들과 토론도 하며 지식을 공유한다. 이러한 과정이 진정한 참여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를 주제로 내건 토론에서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 발전이 지니는 대립적 관계는 비켜갈 수 없는 논제였다. 토론자들은 대개 경제 성장보다는 민주주의 발전이 중요한 가치라고 주장했다. “성장과 복지를 함께 추구할 수 있는 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면한 과제라는 이유로 경제 성장만을 추구했던 것이 최선은 아니었다고 본다”라는 전소현양의 주장에 대다수 토론자가 비슷한 의견을 냈다. 이에 대해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한 절대적 빈곤 아래에서 민주주의 발전 대신 경제 성장 위주의 정책을 편 것은 선택이 아닌 의무였다는 유태관군의 주장이 대립했다. 김현영양 역시 “그 당시 눈앞에 펼쳐진 생존의 문제가 급했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당시 정권과 국민들한테 남의 얘기처럼 들리지 않았을까”라는 의견을 폈다.
토론자들이 미처 지적하지 못한 문제들은 질문자들의 몫이었다. ‘선성장 후분배’가 중요하다는 유태관군의 주장에 한 질문자는 “선성장 후분배 정책에 있어 어느 시점에 분배를 해야 하는지 정확한 기준을 밝혀달라”고 물었다. 이 대회는 하루 전날 열린 본선에서 8명의 토론자와 함께 질문자도 8명 뽑았다. 토론자 8명은 최우상을, 질문자 8명은 우수상을 받게 된다.
글·사진 김다영 아하!한겨레 학생기자 kdy238@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