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대통령이 한-일 정상회담을 이틀 앞둔 21일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와 강제동원 문제에 대해 기존 합의를 존중하겠다고 밝히면서 대일본 ‘투트랙 실용외교’ 원칙을 재확인했다. 대일 관계에서 과거사와 현안을 분리해, 미래 협력에 방점을 찍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면서 오는 25일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우호적인 한-일 관계를 협상의 지렛대로 삼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언급한 기존 합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강제동원 문제로 과거 박근혜·윤석열 정부에서 ‘굴욕 합의’로 비판을 받은 바 있다. 2015년 박근혜 정부는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이라는 표현까지 쓰며 일본과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합의했지만, 일본의 법적 책임을 명시하지 않은 채 도의적 사죄와 일본 정부의 10억엔 출연 약속만 받아내 “부실 협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2023년 윤석열 정부가 합의한 ‘강제동원 피해배상금 제3자 변제안’도 한국 정부 산하 재단이 일본 기업 대신 배상금을 지급하기로 하면서 “굴욕 외교”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 대통령이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기존 합의를 존중하기로 한 것은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과거사 문제보다 실리를 챙기겠다는 외교 원칙을 반영한 것이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위안부 합의 존중’과 관련한 질문에 “(이 대통령의) 8·15 경축사 부분과 연동해서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며 “한-일 관계는 과거의 문제를 덮는 게 아니라 직시하긴 하지만, 미래 지향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방향이 될 것이라는 말과 연결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이와 관련해 인터뷰에서 한국과 일본이 공조해야 하는 배경으로 “글로벌 경제·통상환경의 변화와 도전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을 들면서 “지금까지의 협력 수준을 넘어서는 획기적인 경제 협력 관계”를 강조했다. 또한 “동아시아를 포함한 태평양 연안국들의 경제협력기구를 확고하게 만들어 나가는 일도 이제는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해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에 긍정적 태도를 내비쳤다.
이런 전략은 한-일 회담 이후 곧바로 이어지는 한-미 정상회담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이 한·미·일 안보 협력을 중시하는 만큼 긴밀한 한-일 관계 구축을 통해 미국과의 협상에서 우호적 분위기를 만들려 한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통상 분쟁이 격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양국 모두 주한미군·주일미군 역할을 재조정하라는 압박을 함께 받고 있는 만큼, 한·일 공동 대응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여기엔 한·미·일, 북·중·러로 나뉘고 있는 동북아 안보 상황의 변화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중국, 러시아, 북한과의 관계 관리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도 한-미, 한-일, 한·미·일 협력은 든든한 토대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한국과 일본이 공조하고,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일조할 수 있는 지역 협력체로서 의미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미국과의) 협상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과의 미래·협력을 강조한 이 대통령은 과거사에 대한 국민감정을 고려해 “과거사 문제는 경제적 문제이기 전에 감정의 문제이므로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 중요하다”며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를 요구했다. 하지만 사과에 나서야 하는 필요나 현실적 압박이 없는 상황에서 일본이 이 대통령의 사과 요구에 부응하는 메시지를 낼지는 미지수다.
서영지 고경주 기자 yj@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