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흙 밟고 자란 기억 탓일까? 요즘 머리맡에 <토지>를 두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일상에 지친 내게 위안은, 섬진강 하구에서 실려오는 갯내음이고 평사리 최 참판댁 별채에 고집스럽게 앉아 있는 서희의 모습이다.
땅은 아프고 그 위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억척스럽다. 착한 월선이를, 천한 신분 때문에 떠나보내고 울부짖는 용이 마음 같은 것. 욕망으로 둘러쳐진 거짓된 시멘트 세상에 살면 살수록, 거칠지만 정직함이 있어 안온한 저 뿌리 같은 땅은 늘 그리움이 되는 모양이다.
땅은 그렇게 늘 땅이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의 눈에 땅은 어김없이 아파트 단지나 골프장 터로 보인다. ‘가난하고 나이 든’ 시골마다 외제차들이 들락거린다. 돈을 후하게 쳐줄 테니 논을 팔라고 한다. 농사도 계속 짓게 해준다고 한다. 임대료는 한 마지기(200평, 660㎡)에 80㎏ 쌀 한 가마니(16만원 정도)면 된다고 한다. 한 마지기에 쌀은 네댓 가마니가 나온다. 대신 마지기당 4만~5만원 나오는 직불금은 가져가겠다고 한다. 농사를 짓고 있다는 증명이 돼 강제처분을 막을 수 있고, 양도소득세 중과세율(60%)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전체 농가의 71%가 자기 땅 아닌 곳에서 농사를 짓는 임차농이다. 대도시 주변은 80~90%가 그곳에 살지 않는 부재지주의 땅이다.
쌀 직불금 때문에 요란스럽다. 고위 공무원, 국회의원, 강남 땅부자에 언론인들까지 농민인 양 직불금을 타갔다. 모조리 조사해 큰 벌 내리겠다지만, 일이 그리 쉬울까? 내려가서 열심히 농사도 지었다고 하면 되고, 임차농과 입만 맞추면 되고, 종자·농약대금 영수증이야 위조하면 그만이다. 이 비 그치면 정부와 지자체는 앞다퉈 규제를 풀고 논은 또 성실하게 그들의 배를 채워줄 것이다. 세계는 돈을 향한 탐욕의 말로를 드러냈지만, 우리 부자들은 건재할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함석진 기자 sjh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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