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섭 |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이재명 정부가 아펙(APEC)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주최국으로서 21개 회원국 정상급 인사가 참여한 초대형 다자외교를 안정적으로 이끌었고, ‘연결·혁신·번영’을 기치로 한 경주선언을 채택했다. 무엇보다 주목할 부분은 일련의 양자 외교였다. 앞이 보이지 않던 한-미 관세와 투자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된 것은 큰 성과다. 특히 숙원 과제였던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과 핵추진잠수함 건조 문제에서 미국의 원칙적 이해를 끌어낸 점은 의미가 깊다. 트럼프 시대였기에 열린 기회의 창을 우리 외교안보팀이 전략적으로 파고들어 만든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세부 쟁점이 여전히 남아 있는 만큼, 후속 협상을 통해 실질적 진전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11년 만에 방한한 시진핑 국가주석과의 한-중 정상회담도 의미가 컸다. 한-중 관계는 그동안 갈등과 교착을 벗어나지 못했으나, 한-미 현안이 정리되고 동맹의 견고함이 다져진 만큼 이제는 중국과의 관계도 복원하며 재정립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일 관계도 어려움은 있겠지만, 신임 다카이치 사나에 정부와 실용적인 관점에서 잘 관리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한반도 정세에서는 긍정적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관심을 모았던 도널드 트럼프-김정은 회동은 결국 불발됐다. 트럼프 대통령의 거듭된 구애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이 판문점까지 찾아와 만나고 싶다는데 이를 거부한 것이다. 물론 김정은도 고심은 했을 것이다. 북한은 중국·러시아와 전략적 연대를 강화하고 있지만, 동시에 미국과의 끈을 유지하는 게 나쁠 리 없다. 그럼에도 김정은이 나오지 않은 이유는 그만큼 북한이 처한 전략적 환경에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북·러 밀착에 이어 북-중 관계도 호전되면서, 미국에 매달리지 않아도 생존과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선물이 확실하지 않은 이상, 섣불리 나서서 잘 다져놓은 중·러와의 연대 노선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평화와 안정의 돌파구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우리 정부는 북-미 회담이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북한이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며 일체의 접촉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주도의 정세 전환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서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자임하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피스메이커’로서의 역할을 주문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또한 ‘동결-축소-폐기’로 이르는 3단계 비핵화 해법을 밝힌 것 역시 악화된 정세를 고려한 실용적인 접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실용적 접근조차도 기대한 효과를 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특히 북한이 핵 문제에 대한 일체의 논의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 큰 걸림돌이다. 축소와 폐기는 고사하고, 출발점인 동결조차 시작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 구축과 비핵화는 조급함을 버리고 긴 호흡에서 다뤄나가야 한다. 지난 30여년의 북핵 외교가 증명하듯, 북한 체제의 내구성과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적 견고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통일과 비핵화는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판도가 크게 흔들려야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내년 트럼프 대통령의 방중이 예정된 만큼, 북-미 회담 가능성에 대비해 ‘페이스메이커’로서의 역할을 준비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게 북핵 문제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간의 새로운 관계 설정이다. 과거 보수 정부가 ‘선 비핵화, 후 평화체제’를 지향했다면, 진보 정부는 ‘비핵화와 평화 프로세스의 병행 추진’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 두 접근 모두 현실적으로 작동하기 어렵다. 따라서 비핵화와 평화체제의 엄격한 연동 틀에서 벗어나, 별도의 트랙으로 진전시키는 접근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확장억제의 심화와 한국군의 첨단 비핵 억제력 강화로 북핵 위협에 대한 지나친 비관론을 극복해야 한다. 아울러 당분간 남북관계에서 전기를 마련하기 어려운 만큼, 주변국을 통한 우회 전략이 필요하다. 한·미 공조를 기반으로 북-미·북-일 대화를 촉진하고, 동시에 한-중·한-러 관계를 전략적으로 관리해나가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긴 인내로 한반도의 겨울을 서서히 녹여가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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