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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오전 국회 앞에서 노동당·녹색당·정의당과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 전국금속노동조합, 반올림 등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금속노조 제공
지난 10일 오전 국회 앞에서 노동당·녹색당·정의당과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 전국금속노동조합, 반올림 등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금속노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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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우 | 노동·교육팀장

 2024년 11월4일, 경제지를 비롯한 아침신문에 일정 소득 이상의 반도체산업 연구개발 노동자에게 ‘주 52시간 노동상한제’(주 52시간제) 적용을 제외해야 한다는 내용의 기획기사들이 약속한 듯, 일제히 보도됐다. 삼성전자, 에스케이(SK)하이닉스와 패권을 다투는 미국의 엔비디아, 대만의 티에스엠시(TSMC)는 밤샘노동이 일상인데, 한국에서는 주 52시간제 때문에 연구개발이 뒤처지고 있다는 내용이 기사에 포함됐다. 미국의 ‘화이트칼라 이그젬프션’이나 일본의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도 나란히 소개됐다.

일주일 뒤인 11월11일, 반도체산업 연구개발 노동자 중 일정 소득 이상인 노동자에게는 주 52시간제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긴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및 혁신성장을 위한 특별법안’을 이철규 국민의힘 의원이 대표 발의했다. 일본은 비슷한 제도를 운영하면서도 도입 대상·절차와 운영 방법, 건강 보호 조처를 법률에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만, 해당 법안은 이를 통째로 대통령령에 위임하는 것으로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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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와 더불어민주당이 이에 반대한다는 뜻을 보이자, ‘주 52시간제 적용 제외’ 없는 반도체 특별법은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 잇따랐다. 반도체 특별법이 반도체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 필요한 국가의 지원 내용을 담는 법률이라면, 정부가 어떤 지원을 얼마나 하는 것이 효과적인 것일지 논의하는 것이 정상적인데도, 오로지 노동자가 주 52시간 이상 일할 수 있어야 경쟁력이 확보된다는 논리가 논의 과정을 지배했다. 노동시간을 줄여 노동자들의 일·생활 균형을 확보하고 건강을 지켜야 할 고용노동부는 주 52시간제 적용 제외를 근로시간의 유연성을 확보하고 노동자들의 ‘근로시간 선택권’을 보장하는 것이라며 법안 통과를 거들고 나섰다.

하지만 노동부의 정성스러운 포장은 금세 찢겨나갔다. 삼성전자의 국회 로비 내용이 드러나면서다. 윤석열 대통령의 내란 사태로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던 지난해 12월5일, 삼성전자는 국회를 찾아가 민주당에 법안 통과 필요성을 역설했다. 만남을 정리한 민주당 문건을 보면, 삼성전자는 대만의 티에스엠시가 노동법을 어겨가며 주 70~80시간씩 일을 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들과 경쟁하기 위해 그 정도는 일을 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주 52시간을 넘겨 일할 수 있는 현행 제도와 관련해서는, ‘재량근로제’는 노동자들에게 자유롭게 일을 시킬 수 없어서, ‘선택적 근로시간제’는 노동자들에게 근로일 사이에 11시간 연속휴식을 보장할 수 없어서, 노동부의 인가를 받으면 최대 3개월까지 주 64시간 일을 시킬 수 있는 ‘특별연장근로’는 인가 신청을 하는 것이 번거로워서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결국 글로벌 기업인 삼성전자가 자신들이 경쟁력이 뒤처지는 원인을 ‘근로시간 부족’으로 삼고, 기존 제도 활용 노력은 하지 않은 채 노동자들에게 손쉽게 장시간 노동을 시키기 위해, 노동법 체계를 흔드는 특별법안을 요구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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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의 이러한 의도를 모를 리 없는 민주당은 다음달 3일 ‘정책 디베이트’를 열어, 삼성전자·에스케이하이닉스 노사가 참여한 가운데 해당 내용을 다시 토론하겠다고 했다. ‘주 52시간제 적용 제외를 논의할 수 없다’던 기존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이러한 의사결정에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뜻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계에선 민주당이 금융투자소득세 관련 정책 디베이트를 연 뒤 기존 입장을 바꾼 적이 있어, 이번에도 주 52시간제 적용 제외를 받아들이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반도체산업이 위기에 빠진 이유가 노동자들이 ‘덜’ 일해서일까? 위기 극복의 해법이 ‘더’ 일하는 것이어야 할까? 삼성전자가 주 52시간제에서 ‘해방’되면 글로벌 1위를 되찾을 수 있을까? 그러면 노동자들도 행복해질까? 정책 디베이트의 결론이 어떻게 나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꼭 찾았으면 좋겠다.

eh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