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 ‘파이돈’ 끄트머리에서 독약을 마시고 죽어가는 소크라테스는 친구 크리톤에게 당부한다. “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마리를 빚졌네. 잊지 말고 갚아주게.”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은 무얼 뜻하는 걸까?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과 치유의 신이었다. 그 시절 아픈 사람이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 들어가 하룻밤을 자고 나면 병이 낫는 경우가 있었다. 치유된 사람은 닭 한마리를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소크라테스는 지금 자신이 죽음을 통과하여 삶이라는 질병에서 해방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몸은 영혼의 감옥이다. 몸이 죽음으로써 영혼이 감옥에서 벗어나 천상으로 돌아간다. ‘파이돈’ 전편에 걸쳐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통해 영혼이 치유되고 구원받는다는 확신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런데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소크라테스의 변론’의 분위기는 ‘파이돈’과는 사뭇 다르다.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삶보다 나은 것 같긴 하지만 정말로 그런지는 죽어봐야 안다고 말한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법정의 소크라테스와 감옥의 소크라테스는 다른 말을 하는 것일까? 플라톤은 초기 대화편을 쓴 뒤 기원전 390년 무렵 이탈리아 남부로 긴 여행을 떠났다. 그곳 크로톤에 피타고라스 학파 공동체가 있었다. 플라톤은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을 만나 깊은 감화를 받고 ‘종교적 회심’을 겪었다.
피타고라스는 ‘철학’(필로소피아·philsophia)과 ‘철학자’(필로소포스·philosophos)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필로소피아란 ‘지혜를 추구함’을 뜻하고 필로소포스는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때 피타고라스가 ‘지혜’라고 부른 것의 핵심에 있는 것이 ‘수’(수학)였다. 피타고라스에게는 수야말로 만물의 아르케(arche), 곧 시원이자 지배자였다. 그렇다면 피타고라스는 어떤 경로를 거쳐 수를 아르케로 발견했을까? 거두절미하면 ‘음악’이 피타고라스에게 수의 신비를 가르쳐주었다. 음악 속에 수학이 들어 있었다.
줄이 하나인 ‘일현금’으로 연주를 한다고 해보자. 그 줄에서 나는 기본음을 ‘도’라고 하면, 그 줄을 절반으로 나누어 짚었을 때 나는 소리가 한 옥타브 높은 ‘도’다. 그 절반을 다시 반으로 나누어 짚으면 한 옥타브 더 높은 소리가 난다. ‘2 대 1’의 비율로 옥타브가 결정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음악의 모든 화음은 수학적 비례로 이루어져 있다. 이 비례는 악기가 바뀐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리라를 연주하든 피리를 연주하든 화음의 수학적 비례는 똑같다. 그렇다면 소리를 아름다운 음악으로 만드는 것은 소리 자체가 아니라 소리와 소리 사이의 비례임이 틀림없다.
피타고라스는 천문학도 연구했는데, 거기서 발견한 것이 음악과 유사한 수학적 질서였다. 태양과 달과 별의 운행을 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예외 없이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궤도를 돈다. 하늘의 별들은 수학적 질서를 이루며 운행한다. 피타고라스는 그 보이지 않는 질서를 따르는 천체들이 ‘천상의 음악’을 연주한다고 생각했다. 현악기에서 나는 소리는 몇 옥타브 올라가면 가청권에서 벗어나 들리지 않게 된다. 그러나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천체의 음악도 우리의 가청권 밖에 있기에 들리지 않는 것뿐이다. 여기서 피타고라스가 찾아낸 것이 눈에 보이는 ‘감성적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초감성적 세계’라는 이중세계였다. 초감성적 세계가 감성적 세계를 산출하고 지배한다.
수학적 질서는 우리 인간 내부에도 있다. 그 질서를 관장하는 것이 ‘영혼’이다. 피타고라스는 영혼이 천상 세계에서 지상으로 떨어져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다. 죄수 신세인 영혼은 천상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천상으로 돌아가려면 먼저 영혼을 다시 정화해야 한다. 이때 영혼의 더러움을 씻어주는 것이 음악과 수학이다. 음악은 비례가 만드는 아름다운 선율로 영혼을 맑게 한다. 수학을 탐구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수적 질서를 깨닫게 해줌으로써 천상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
그러나 육체에 사로잡힌 영혼이 더러움을 다 씻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화를 완수하지 못한 영혼은 지상 세계를 윤회해야 한다. 피타고라스의 이런 믿음을 알려주는 일화 하나가 전해온다. 어느 날 개 한마리가 매를 맞고 있는 것을 보고 피타고라스가 소리쳤다. “때리지 마라. 그 개의 영혼은 내 친구의 영혼이다. 개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그 영혼을 알아보았다.” 영혼은 정화를 마칠 때까지 몇번이고 육체라는 감옥을 옮겨 다니며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플라톤이 이탈리아 여행에서 만난 것이 이 이중세계와 윤회사상이었다. 이 만남과 함께 플라톤의 ‘중기 사상’이 시작된다. 그 중기 사상에 등장하는 것이 ‘이데아 이론’이다. 이 세상 사물이 가치 있는 것은 그 사물들이 이데아를 본받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가 천상의 수적 질서가 만물을 관장한다고 보았듯이, 플라톤은 천상의 이데아들이 지상의 모든 것을 다스린다고 보았다. 플라톤에게 이데아가 있음을 확신하게 해준 것이 수학이었다. 수학의 진리는 보이지 않지만 어김이 없고 틀림이 없다. 플라톤은 자신이 세운 학교 입구에 “기하학을 배우지 않은 사람은 들어올 수 없다”라고 새겨 놓았다. 우리 영혼은 그 이데아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어서 이데아 세계로 돌아가기를 열망한다. 죽음이란 육신의 무덤을 탈출해 영원한 진짜 세계로 되돌아감이다.
지상의 세계와 천상의 세계라는 플라톤의 이중세계는 머잖아 기독교와 결합해 2000년 동안 서양 세계를 지배했다. 지상의 세계는 거짓된 가상 세계고 천상의 세계야말로 참된 실재 세계다. 그 기독교 이중세계에 맞서 일생일대의 철학적 전쟁을 벌인 사람이 19세기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다. 루터파 목사의 아들이었던 니체는 플라톤-기독교의 가르침이 지상 세계를 부정하고 천상 세계를 숭배함으로써 우리의 몸과 삶을 병들게 했다고 생각했다. 그 질병에서 해방되려면 플라톤의 길과 정반대로 난 길을 걸어야 한다. 천상의 세계로 향하던 눈을 지상의 세계로 돌려야 한다.
니체는 정신이 온전했던 마지막 해(1888)에 ‘우상의 황혼’이라는 책을 썼다. 그 책에서 ‘어떻게 참된 세계가 꾸며낸 이야기가 되고 말았는가’라는 제목으로 서양의 2000년 정신사를 여섯 단계로 요약했다. 첫 단계. ‘지혜로운 자, 경건한 자, 덕 있는 자는 참된 세계에 이를 수 있다.’ 이 말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가리킨다. 둘째 단계. ‘참된 세계는 지금은 이를 수 없지만 회개하는 죄인에게는 약속돼 있다.’ 플라톤이 기독교로 번역됐다는 얘기다.
셋째 단계. ‘참된 세계는 볼 수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지만, 위안으로서, 의무로서 요청된다.’ 이것은 18세기 칸트 사상을 가리킨다. 칸트는 현상 세계 너머에 ‘사물 자체’라는 미지의 세계를 상정하고, 그 세계에 도덕의 왕국을 세웠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살려면 참된 세계가 있다고 믿어야 한다. 이어 ‘참된 세계라는 건 알 수도 없고 도달할 수도 없고 쓸모도 없으니 없애버리는 게 낫다’는 실증주의-유물론의 시대가 등장한다. 저세상은 없다!
마지막으로 니체는 참된 세계를 없애버린 뒤에 무엇이 남는지 묻는다. ‘참된 세계가 사라지면 이 가상 세계만 남는가? 아니다. 우리는 참된 세계와 함께 가상 세계도 없애버렸다.’ 천상의 참된 세계, 기독교 신의 세계가 이 지상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주었는데, 그 세계가 사라짐으로써 이 세계의 의미도 가치도 함께 사라져버렸다는 얘기다. 이제 남은 것은 모든 의미가 증발한 폐허의 세계뿐이다. 니체는 이 황량한 세계에서 우리 스스로 모든 의미와 가치를 처음부터 새로 창출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니체의 철학적 투쟁은 영웅적인 데가 있다. 그러나 영웅적이라고 해서 꼭 옳은 것은 아니다. 니체는 하나를 빠뜨렸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폐허 위에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살아온 땅이 있고 그 땅에서 만들어온 역사가 있다. 그 역사의 지평을 우리 마음대로 초월할 수 없다. 역사는 우리를 제약한다. 우리의 자유는 니체식의 무역사적 반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제약을 우리의 조건으로 수락하는 데 있다. 역사 안에서, 다시 말해 ‘과거가 만든 현재’ 안에서 현재를 이겨내며 우리는 미래로 나아간다. 그 미래를 열려면 가짜 권력자들이 날뛰는 이 끔찍한 현실부터 뚫고 나가야 한다.

고명섭 | 텍스트팀 선임기자.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생각의 요새’, ‘광기와 천재-루소부터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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