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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칼럼

[김병익 칼럼] 고향을 잃다

등록 :2022-01-28 04:59수정 :2022-01-28 08:17

그 새삼스러운 정다움 속에서 지난 것들에 대한 향수는, 그럼에도, 여전한 미련으로 부스럭거렸다. 성장은 때묻지 않은 시절의 순진함으로부터 스스로를 멀리 밀어내는 것이고, 변화란 철들지 않은 어린 나이의 순결로 돌아갈 수 없음을 뜻하리라.

김병익|문학평론가

창밖의 광장과 그리로 가는 한길을 덧없이 바라보던 내 눈길에 문득 시골 마을길이 떠올랐다. 70여년 전 집에서 학교로 가는 등굣길이었다. 지방 도시의 도심지에 살고 있던 나는 학교 가는 길이 여럿이지만 아침에 집을 나서면 대체로 포장도로, 신작로, 좁은 동네길, 그리고 왼쪽은 기와집들이고 오른쪽은 논이던 둑길을 거쳐 아담한 붉은 벽돌 단층 교사를 만난다. 나는 이 길을 한국전쟁으로 달라지기 전까지 5년 동안 다니며 신작로에서는 돌차기, 가을논에서 벼 이삭 훑기를 하며 먼 길을 장난치듯 걸음질했다. 그 옛길이 문득 떠오르며 그 길이 여전한지, 달라졌겠지만 어떻게 달라졌는지 새삼 궁금해졌다. 역병이 돌기 몇달 전이었다.

내 귀향길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더니 차를 가진 두 사위가 나섰고 거기 딸린 가족이 아내와 함께 같이 가자고 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내가 사양한 것은 내 늙마의 호젓해야 할 여행이 가족여행으로 본의가 달라질 것이어서였다. ‘센티멘털 저니’를 사양하면서 대신 찾아본 것이 인터넷의 지도와 영상이었다. 주소를 쳐서 나온 지도는 아차, 내가 미처 예상 못한 아파트단지 안내도였고 사진들도 여느 연립주택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그리며 기대한 것과 전혀 다른 풍경들이었다. 그제야 나는 둔감한 내 머리를 저었다. 인구 150만명으로 늘어난 이제, 내가 어쩌자고 두 세대 전 5만의 소도시 풍경을 기대했던 것일까. 내가 400리 떨어진 그 지역 길을 보거나 40리 남쪽의 강남 아파트단지를 보거나 분명 비슷한 그림일 것이었다.

나는 내 어린 시절의 동네와 길을 잃었다는 조금 속 아픈 쓸쓸함을 느꼈다. 그 생각은 이른바 ‘고향 상실’이란 멋진 말을 떠올려주었고 이어 20년 전의 아들 얼굴에 띠었던 어두운 빛을 회상시켜주었다. 유학 중에 잠시 귀국한 어느 날 아들은 우리 가족이 살던 서울 변두리 동네의 옛집을 찾았던가 보았다. 네 자식이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그리고 결혼해서 독립해 나가기 전까지 식구 모두가 25년 넘게 엮여 지내던 우리 집은 내가 신도시로 이삿짐을 싣고 떠나는 자리에서 인부들의 괭이질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우리 정든 집이 내 눈앞에서 참혹하게 부서지는 모습에 나도 질려 눈을 돌리고 말았었다. 유아 시절부터 유학 가기까지 살았던 집이 사라지고 때아닌 연립주택이 낯설게 서 있는 모습을 보는 아들의 마음은 얼마나 허망했을까. 나는 ‘하이마트로제’(Heimatlose)란 말을 떠올렸고 아들을 고향상실자로 만들며 성장기의 갖가지 정들을 왕창 헐어버린 내 매정을 후회하며 뒤늦게 마음 아픈 공감을 느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인터넷에서 ‘고향 상실’을 쳐보았다. 그 설명은 그 말이 사사로운 감상에 젖은 상투어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형이상학과 과학 기술이 지배하는 시대에 인간이 처해 있는 존재론적 상황을 설명하기 위하여 철학자 하이데거가 사용한 개념”이란 정중한 풀이로 시작하여 “인간 현존재가 자신의 고유한 실존에 이르지 못하여 ‘외적 존재’로 전락할 경우 이 상황에 처함을 밝히고, 철학의 본래적 과제를 ‘존재의 진리’가 훤히 드러나는 곳으로 귀향하려는 노력으로 규정하였다”는 까다로운 설명으로 이어졌다. 내가 대학 시절 헌법학 교수 한태연 박사로부터 처음 들은 ‘하이마트로제’의 멋진 말은 그저 유행에 젖은 입말로 나불거릴 수 없는, 의외로 무거운 무게와 깊은 뜻을 담고 있었다.

내친김에 나는 이 인터넷이 추천하는 박찬국 교수의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를 구입해 보았다. “‘시인으로서 지상에 거주한다’는 것은 ‘지상의 모든 인간과 사물의 성스러운 신비를 경험하면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라고 진지하게 시작한 박 교수의 강의는 하이데거가 우리 시대를 ‘고향 상실의 시대’로 규정했다는 것, 과학기술은 ‘광기의 시대’이고 풍요한 이 시대는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버린’ ‘궁핍한 시대’로 짚었음을 강조했다. 이어 “경이라는 기분 속에서 바라볼 때 우리는 그것에서 그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광채’를 보게 됩니다. 하이데거는 이 광채를 일컬어 ‘존재의 빛’이라고 말합니다”라는 아름다운 구절을 읽으면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김우창 비평집)이란 존재는 세계의 부조리를 실존적 각성으로 투시하는 인간임을 깨달았다.

나는 존재, 우연, 저항, 불안 등등 젊었던 시절의 내 안을 괴롭히다가 잊힌 실존주의적 언어를 만난 것이 반가웠으며 “삶을 짐으로 여길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 “죽음은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각자의 고유한 가능성”이란 아픈 정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나이의 서러움을 되새김하면서 “침묵의 정적 속에서 진정한 시가 발원”하는 것이고 ‘정보언어’가 지배하는 오늘의 세계에서 ‘존재의 언어’를 헤아려 고독을 누릴 마음가짐을 다져야 할 노령과 함께하고 있음을 배웠다. “깊은 겨울밤 사나운 눈보라가 오두막 주위로 휘몰아치고 모든 것을 뒤덮을 때야말로 철학을 할 시간이다.” 이럴 때야말로 존재의 아픈 본뜻이 살아나며 삶의 슬픈 진상이 위로받을 것이고 의식의 고픈 희망이 비칠 것이며 소망의 바랄 수 없는 진의가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나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지난 이제야 진지해졌고 물러난 날들을 허물하지 않으며 후회할 수 있었다.

단골 카페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얼마 남지 않은 앞일을 바라보기보다 80년 넘은 지난날들의 산더미 같은 회상들을 돌아보는 것이 새삼스레 안타깝고 외로움 속에서 아늑하다. 서로 어긋난 감정들의 이 얽힘이 이 나이의 특전이고 수줍어해야 할 뿌듯함일지도 모르겠다 싶어진다. 고향 상실의 아픔과 그 정일한 뜻은, 나이 하나 더 먹어 삭이게 되는 이제, 상투화하는 삶 속에서 비로소 신선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고향을 잃었다, 그리고 존재의 근원을 상실했다. 그럼에도/그래서. 나의 근원을 다시 그리워하며 고향을 찾는다. 슬퍼져 버린 것은 그 고향이 이미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 몇달 전 나는 안국동 골목을 거쳐 현대미술관을 가는 골목에서 고향 같은 골목길을 걸으며 옛집보다 화사한 기와집들을 보고 마음 훈훈해했다. 광화문 피맛길은 없어졌지만 북촌의 옛 동네는 아직도 다사롭고 좁은 길들은 넉넉했으며 샛길 바람은 싱그러웠다. 그 새삼스러운 정다움 속에서 지난 것들에 대한 향수는, 그럼에도, 여전한 미련으로 부스럭거렸다. 성장은 때묻지 않은 시절의 순진함으로부터 스스로를 멀리 밀어내는 것이고, 변화란 철들지 않은 어린 나이의 순결로 돌아갈 수 없음을 뜻하리라. 지난 것들의 잃어버림이란 감정은 고향 상실이 어떤 마음의 것인지 실감시켜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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