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만 대충 수습하고 살”았던 ‘올드보이’ 오대수가 칸을 홀린 지 21년 뒤 “유지보수만 수차례” 유만수가 베네치아를 뒤흔들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가 제82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되자 호평과 함께 수상에 대한 기대감이 치솟고 있다.
지난 29일 밤(이하 현지시각) 베네치아 리도섬의 극장 ‘팔라초 델 치네마’ 앞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극장 앞 레드 카펫에서 박 감독을 기다리던 유럽 관객들의 입에선 “감독님, 사인해주세요” “영광입니다” 등 또렷한 한국어가 튀어나왔다. 주연배우 이병헌에게도 “리”를 외치며 사인과 사진 찍기를 요청했다.
이날 처음 공개된 ‘어쩔수가없다’는 박찬욱 영화 중 가장 많은 유머를 장착한 작품이자 이병헌의 가장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영화다. 녹색의 자연이 가득한 화면, 클래식한 연주곡부터 조용필·산울림·트로트까지 아우르는 음악, “어쩔 수가 없다”는 핑계에 숨어 노동자를 파리 목숨처럼 가볍게 여기는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까지, 2시간19분의 긴 러닝타임이 거장 감독의 새로운 면모와 노련한 기량으로 꽉 찼다.

오래됐어도 손수 아름답게 꾸민 집, 예쁜 아내(손예진), 아들딸과 힘겹게 대한민국 중산층 ‘정상 가족’에 도달했다고 스스로 인정한 순간, 평범한 가장 만수(이병헌)의 삶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외국 회사와 합병하며 그가 관리·감독하던 생산라인이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다. 석달 안에 새 직장을 구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결국 생각해낸 건 잠재적 경쟁자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는 인력을 구한다는 가짜 광고를 통해 목표물을 정하고 행동에 옮긴다.
박 감독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원작 소설 ‘액스’를 스크린으로 옮기면서 범행 대상을 7명에서 3명으로 압축하고, 각 살인의 디테일을 ‘박찬욱풍’으로 크게 바꿨다. 특히 경쟁자 범모(이성민)의 아내 아라(염혜란)는 이야기의 긴장감과 웃음을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라가 뱀에게 물린 만수의 다리를 요상하게 붙잡고 응급 조치를 할 때 객석에선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조용필의 ‘고추잠자리’가 흐르는 가운데 만수·범모·아라가 뒤엉켜 싸움을 벌이는 장면 역시 박찬욱 특유의 독특한 연출로 웃음을 자아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무기력한 만수는 박 감독의 전작 ‘올드보이’ 오대수를 떠올리게도 한다. ‘올드보이’에는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자”는 오대수 이름에 관한 자학적 농담이 나오는데, 이번 영화에는 “유지보수만 수차례, 유만수”라는 이웃 남자의 조롱이 등장한다. 이병헌은 오대수의 최민식과는 또 다른 색깔의 압도적 연기력을 보여준다. 전세계 언론에서 “놀라운” “압도적인” 등 표현을 동원한 극찬이 나오고, 남우주연상 수상도 점쳐진다.
영화가 끝난 뒤 객석에선 “브라보” 환호와 기립박수가 9분가량 이어졌다. 박 감독은 배우들과 일일이 포옹하고 감격에 겨운 듯 객석을 향해 한참 손을 흔들었다. 손예진 등 배우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감격하는 가운데, 이병헌만은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병헌은 다음날 한국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남들이 보기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같았겠지만, 멍한 상태였다”며 “꿈인지 현실인지 잘 구별이 안돼서 오히려 담담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털어놨다.

이날 영화를 본 이탈리아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가이아 세레나 시미오나티는 “언제나처럼 이번 영화도 우아하고 섬세한데, 주제의식에 때로 깊게 들어가고 때로는 웃기기도 하면서 정리해고라는 비극적 주제의 진실을 가장 효과적으로 다뤘다”며 “수상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으로 이병헌 팬이 됐다는 불가리아 라디오 기자 히리시모프 라자는 “자기가 원하는 걸 이룰수록 오히려 어두워지는 이병헌의 연기가 대단했다”고 치켜세웠다.
외신 반응도 호평 일색이다. 미국 매체 데드라인은 “이병헌의 놀라운 연기를 담아낸 작품이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대한 박찬욱 감독의 응답처럼 보이는 짙은 블랙코미디”라고 해석했다. 영국 가디언은 “박찬욱 감독의 최고 걸작은 아닐 수 있지만, 지금까지 베네치아 경쟁 부문에 오른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영화”라고 평했다.
영화에선 만수를 비롯해 여러 인물들이 “어쩔 수가 없다”는 대사를 내뱉는다. 박 감독은 한국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를 영화 제목으로 한 것과 관련해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피하고 싶을 때, 변명하고 싶을 때 감탄사처럼 툭 내뱉는 말이다. 그래서 문장을 한 단어처럼 보이게 제목에서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며 “관객이 영화를 보고 우리가 일상에서 이 말을 얼마나 자주 쓰는지 느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어쩔수가없다’는 13년 만에 베네치아 경쟁 부문에 진출한 한국 영화다. 2012년 같은 부문에 진출했던 고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는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어쩔수가없다’의 수상 여부는 오는 6일 밤 폐막식에서 공개된다.
베네치아/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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