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투라는 단어는 여전히 오독된다. 성폭력을 고발하는 생존자를 지지하기 위해 ‘나도 발언한다’는 의지로 유사한 성폭력 경험을 토로해, 그 피해가 개인의 특수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침묵을 요구하는 사회적 압박에 억눌린 수많은 이들에게 공통된 경험이었음을 말하고자 ‘미투’를 해시태그로 많은 여성들이 동시에 고발에 나섰고, 그것이 미투운동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고발에 동참하는 이들에게 그 단어는 ‘나도 다르지 않다’, ‘나도 말한다’, ‘나도 연대한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를 알리기 위해 가해자를 폭로하고 피해자와 연대하려는 의지를 담은 것이었다.
국가대표 체육 선수, 할리우드의 배우부터 십대의 학생들까지 고발과 연대의 뜻으로 미투에 동참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언론에서 보도할 때, 여전히 많은 경우 “미투(나도 당했다)”라고 표기된다. ‘나도 당했다’는 성폭력을 고발하면 개인이 낙인찍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능동적으로 연대하는 미투를 다시 수동적 피해의 자리로 돌려놓는 표현이다. 심지어 가해자에게 ‘미투당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해 가해자를 피해자 위치에 두는 일도 보인다. 이재정 의원이 미투에 동참했을 때 받은 질문 중 “어떻게 당했냐”, “의원님도 당했느냐”라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건 이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는가를 둘러싼 문제를 잘 보여준다.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라영의 <폭력의 진부함>은 성폭력 피해 생존자를 독려하고 연대하기 위해 쓰였다. 그 방법은 책의 구성에 잘 드러나 있다. 1부의 제목은 ‘복기’, 2부의 제목은 ‘얼굴, 이름, 목소리’이다. 1부에는 1970년대 중반에 태어난 저자의 개인사를 담았는데, 열 살을 넘긴 1980년대 중후반에서 시작해 1988년부터 2018년까지는 거의 해마다의 일이 담겼다. 그가 무엇을 보았고, 경험했고, 견뎠고, 이상하게 여겼고, 선택(했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한국 여성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가정과 학교, 그리고 학교 바깥의 사적이고 공적인 공간에서 어떤 일을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되는지의 기록이다.
이 책이 나누는 경험은 이런 것들이다. 고속버스 옆자리에 말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앉아 상의를 벗어 덮고는 그 아래로 손을 뻗어 나를 만지기 시작한다. 입시를 위해 서울에 와서 숙박비를 아끼려고 다른 여자 친구와 함께 그 친구의 아는 오빠 자취방에서 신세를 지는데, 다른 집에서 자고 온다던 그 오빠가 한밤중에 다시 돌아와 친구를 더듬다가 격렬히 “하지 말라”는 말을 듣더니 내 뒤에 누워서 이번에는 나를 만진다. 학과에 남학생이 줄어드는 것이 선배들의 공공연한 걱정이다. 남학생이 줄어드는 추세가 보이자 아예 남학생 정원을 따로 정한다. 길거리에서 설문조사에 응하고 집에 가려는데, 설문지 작성을 요청한 남자가 쫓아와서는 “덧니가 너무 예뻐서요”라고 한다. 남자친구와 헤어지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는 일하는 곳까지 쫓아와 위협적으로 군다. 직장 상사와 외근을 나갔다가 상사의 친구와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 친구라는 사람이 나를 보더니 새끼손가락을 들고 ‘이거’냐고 묻는다.
피해자들은 ‘그때’를 반복해 떠올리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고 싶어한다. 가해자들은 기억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가해가 아니라 일상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대로 해도 이기는 판이기 때문에 복기할 필요가 없다는 이라영은 ‘기억은 정치적 문제다’라고 한다. “내가 말을 했을 때, 그때 나는 알았다. 대부분 내 말을 들어줄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현실적으로 가장 명예를 지키는 방법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내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게 만들기. 그렇게 문제를 스스로 가려 버렸다.” 코로나19 때문에 식당에서 방문기록을 작성할 때, 거기에 적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거는 남자들이 뉴스에 보도된다. 책 속의 이야기는 사람과 장소가 변주될 뿐 활발히 진행중이다.
폭력의 진부함이라는 이 책의 제목은 폭력이 진부하다는 말이 아니라, 폭력이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로 만연해 있으며 그래서 분명하게 말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피해를 선정적으로 소비하는 대신 가해를 분명히 드러나게 하고 그에 대한 처벌을 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2018년 불법동영상 유출로 큰 돈을 번 위디스크 소유주 양진호 사건이 널리 알려진 것은 남성 직원을 향한 갑질 때문이었다. “직원 폭행 동영상은 폭력을 고발하는 역할을 하지만 성착취물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고발하지 않는다.” 피해자 낙인찍기가 아니라 연대하기가 더 많은 여성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발언이다.
<폭력의 진부함>은 성경의 이브와 아담에서부터 시작해, 동화 <인어공주>나 소설 ‘백치 아다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강간>, 영화 <상류사회> 등을 통해 말하기의 정치학을 풀어간다. 보는 사람과 보여지는 사람은 어떻게 정체화되는지를 한국 사회의 사건들을 통해 다루고, 말하는 사람이 된다는 건 왜 피해자에게 중요한지를 여러 맥락에서 짚어낸다.
관계와 매매, 폭력을 구분하려면 ‘나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의지’를 고려해야 한다. 타인을 인격적 대상으로 봐야 한다.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인격체라는 당연하지만 좀처럼 지켜지지 않는 가치를, 이라영은 여성이 말하고 그 목소리가 존중받을 때 이룰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성폭력 고발 운동은 남성들의 사생활이라는 괄호 속에 있던 여성의 일상이 그 괄호를 부수고 정치화되는 순간이다.”
이라영의 말처럼, 폭력은 진부하게 반복되는데 이에 대한 저항은 언제나 진부하지 않다. 보여지고, 듣고, 해석되기만 하는 존재에 그치는 대신 침묵시키는 권력에 저항해 자기 이야기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분투. <폭력의 진부함>의 부제가 ‘얼굴, 이름, 목소리가 있는 개인을 위하여’인 이유다.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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