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 위키미디어 코먼스
독일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 위키미디어 코먼스

공론장의 새로운 구조변동
위르겐 하버마스 지음 l 한승완 옮김 l 세창미디어 l 1만500원

프랑크푸르크학파 2세대를 대표하는 독일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90살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이론과 현실에 논쟁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최근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서방의 태도를 비판하며 종전 협상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버마스가 2022년에 펴낸 ‘공론장의 새로운 구조변동’은 하버마스 이론의 출발점과도 같은 ‘공론장’의 변동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은 제목이 보여주듯이 하버마스가 1961년에 처음 출간한 ‘공론장의 구조변동’의 후속편이라고 할 만하다. 교수자격 논문으로 쓴 ‘공론장의 구조변동’은 18~19세기 영국·프랑스·독일에서 ‘부르주아 공론장’이 형성되고 변동하는 과정을 살피고 이 공론장의 후신인 당대 공론장에 대한 평가를 담았다. 그 공론장이 21세기에 들어와 어떤 변화를 겪는지를 살피는 것이 ‘공론장의 새로운 구조변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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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공론장에 관한 하버마스의 관점은 크게 보아 세 단계의 변화를 겪었다. 첫 단계는 ‘공론장의 구조변동’의 1961년 초판에 나타난 관점이다. 초판에서 하버마스는 1960년대 서구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것은 19세기 부르주아 공론장이 쇠퇴한 탓이라고 진단했다. 보편성·공개성·공공성을 앞세워 서구 민주주의의 형성에 기여하던 공론장이 20세기에 들어와 껍데기만 남은 형태로 퇴락했다는 진단이었다. 하버마스는 국가와 사회가 분리됨으로써 근대 민주주의가 발흥할 수 있었는데 이런 분리의 흐름이 멈추고 오히려 ‘재봉건화’로 역행하고 있다고 당대 공론장을 비판했다. 또 공론장의 주체도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공중’에서 ‘개인주의적인 공중’으로, ‘문화비판적인 공중’에서 ‘문화소비적인 공중’으로 전락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1990년에 펴낸 이 책 재판에서 하버마스는 초판의 견해가 ‘단견’이었다고 자기비판을 감행했다. “나는 대중의 저항 능력과 비판적 잠재력을 그 당시 과도하게 비관적으로 평가했다.” 1960년대 이후에도 서구 자유주의 사회에서 공론장이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살아 있으며 시민 주체의 저항 능력도 작동하고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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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재판 출간 후 다시 30년이 지난 뒤에 나온 새 책에서 하버마스는 21세기 디지털 미디어 환경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서구의 자유주의 공론장이 다시금 긍정적 성격을 잃어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공론장의 원칙이라 할 포용성·보편성·진실성이 뒤로 밀려나고 공과 사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화한 의사소통의 기술적 진보는 처음에는 경계를 허무는 경향을 촉진하지만, 공론장의 파편화 경향도 촉진한다.” “소셜 미디어의 배타적 이용자들 사이에서는 반(半)공적, 파편적, 자기순환적 의사소통의 방식이 관철돼 정치적 공론장 자체에 대한 인식을 변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급속한 변동이 포퓰리즘이 창궐할 환경을 만들어냄으로써 공공적 의사 형성의 토대인 토의(숙의)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가 기성 미디어를 대체하는 시대에 커져가는 공론장 위기에 대한 노학자의 우려가 깊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