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리핀을 떠올리면서 어딘가 가벼운 기분이 든다면 그건 세부, 보라카이 등 유명한 휴양지 덕분일 것이다. 그에 비하면 수비크와 클라크라는 도시는 이름부터 낯설다. 취재를 가면서도 황급히 짐을 싸서 대책 없이 수학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수비크와 클라크는 동굴이나 정글 등의 미지를 탐험한 듯한 풍족한 여운을 남긴다.
오금 저리는 트립탑 체험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두 시간 남짓 떨어진 수비크와 클라크, 두 도시는 미군부대가 있었다는 점 말고도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두 지역을 지나며 “철저한 계획도시이기 때문에 검문소가 많아 안전하다”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누군가 맘먹고 빚어놓은 듯한 천혜의 자연환경이 눈에 들어온다. 스페인, 일본, 미국의 간섭을 받은 역사적 굴곡 사이로 모험이라는 키워드는 공통적으로 수비크와 클라크를 묶는다.
클라크는 도시 명칭부터 미군 통신대 소속의 병사 해럴드 클라크(Harold Clark)에서 따왔듯이 미군과 밀접한 연계 속에서 20세기를 보냈다. 미국 공군은 이곳을, 아시아 지역을 군사적으로 견제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이용하다 1991년에야 철수했다. “클라크는 무척 안전해요. 지금은 미 공군의 활주로를 이용해 국제 항공노선으로 운용하고 있죠.” 이러한 계획적인 변화 속에서 눈에 들어오는 건 의연하게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피나투보(Pinatubo) 화산이다.

교과서 도판으로 봤던 화산의 적막함 대신, 피나투보 화산은 그 적막함마저 살아 있다. 그다지 높지 않은 기암괴석과 듬성듬성 보였다가 어느 순간 나타나는 무성한 녹색 수풀들이 인상적이다. 그리 멀지 않은 시간까지 화산활동을 했음을 말해주는 두 토막 난 땅, 누군가 옮겨 놓다 시간이 부족해 중간에서 멈춘 듯한 산 조각들이 보인다. “1991년 6월 폭발했다. 지상 20㎞까지 치솟은 화산으로 분출된 화산재만도 50억톤. 폭발 후 약 25만명이 집을 잃고 9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설명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영화 주인공들이 사라진 영화 세트장. 외계 행성에 있을 법한 바나나 나무, 태연한 소와 말, 여전히 남아 훈련중인 군인들 무리가 띄엄띄엄 나타났다.
불덩이가 지나간 자리에 매력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관광안내원이 소개하는 사이 얄궂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곧 광풍을 동반한 비와 천둥까지 몰아쳤다. 주변엔 우리 외에 아무도 없었다. 4륜구동 오픈카, 지프니로 불리는 이 차는 1940년 필리핀에 들여온 ‘지아이 지프’(GI JEEP)에서 영감 받아 만들어진 전쟁의 창조물이라고 했다. 창 바로 옆에 타서 손을 밖으로 내밀고 있던 나는 약간의 불안감과 흥분을 느꼈다. 1달러를 주고 산 노란 우비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끝없이 펼쳐지는 헐벗은 길은 관광지라고 하기엔 너무나 ‘야생’ 그 자체였다.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차가 저 언덕을 잘 올라갈 수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비 오는데 여기엔 우리 차뿐이고.”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은 운전사 에드윈은 이 관광객의 호들갑이 자기에겐 구경거리라는 표정이다. 비가 내려 차가 땅 아래로 푹푹 꺼지는데, 에드윈은 오히려 물이 흥건한 구덩이로 들어간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마을 원주민들이 험난한 길마다 나타나 능수능란하게 차의 이동을 돕는다. 뒷바퀴에 걸린 큼직한 돌을 빼주고, 질퍽한 빗물 사이를 성큼성큼 뛰어다니며 3~4명이 몰려와 차를 밀어준다. 이건 정말 야생이다! 주말 티브이를 장식하는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이 떠올랐다. 어릴 적 겨울 휴가길, 눈이 수북하게 쌓여 차가 옴짝달싹 못할 때 걱정하는 부모님과 달리 내심 그 모험이 신났던 일도 기억났다.

기묘한 바위들을 지나면 어느새 화산재가 켜켜이 쌓인 듯한 평지가 보인다. 그러다가 다시 더는 차가 끼어들 틈이 없는 구불거리는 좁은 경사지가 나온다. “30분 남짓 트레킹을 하면 놀랄 만한 게 보일 거예요!” 머뭇거리는 내게 자기의 등산용 신발(사실은 슬리퍼)까지 벗어주는 에드윈의 제안에 원시적인 수풀을 휘저으며 걷기 시작했다. 땀이 흐르는 트레킹 끝에 볼 수 있는 건 쪽빛 칼데라호, 이 물에 뛰어들고 싶은 기분이 든다면 피나투보 화산 대폭발 이후 생겨난 근처의 푸닝온천을 찾으면 된다. 화산을 내려가며 다시 시작된 빗줄기, 산을 내려가는 이 길도 어드벤처다. ‘산에서 사는 사람’이란 뜻을 가진 원주민 ‘아이타족’이 갑자기 뛰어나와 에드윈에게 인사했다. “타운에 장 보러 가겠다”며 지프 꼭대기에 올라타 우리와 동행했다.
마닐라에서 북서쪽으로 150㎞ 떨어진 도시 수비크도 모험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1992년까지는 아시아 최대의 미국 해군기지였던 이곳엔 여전히 맑은 빛의 바다가 있다. 정박된 관광용 흰색 요트와 늘어난 리조트 건물이 최근의 변화를 보여준다. 수비크에선 높이 10미터가 넘는 나무들로 둘러싸인 열대우림 속에서 그 사이를 건너가게 하는 트립탑 체험이 대표적이다. 나무들을 도르래로 연결해 이 나무에서 저쪽 나무로 이동할 수 있는 승강장을 만들어, 마치 허공에 뜬 나무택시처럼 이용한다. 놀이기구 타는 기분으로 공중그네에 앉았지만 이내 이동 속도가 느릴수록 더 무섭다는 걸 깨달았다. 눈을 감고 이동하기를 3분, 시야 10미터 앞에서 20대 초반의 여자가 신나 죽겠다는 표정으로 번지점프를 반복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정글에서 살아남는 법도 배웠네미군 훈련장을 개조해 만든 제스트 캠프는 베트남전 참전 미군들이 베트남에 가기 전 아이타족에게 정글 생존법을 배우던 곳이다. 아이타족은 대나무 하나로 포크, 숟가락, 그릇 등 모든 생활용품을 직접 만들고 대나무 수액으로 물을 마시는 식의 정글 생존법을 가르쳐 준다. 50대 후반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아이타족은 마치 티브이 프로그램 <세상에 이런 일이>에 여러 번 등장한 듯, 노련한 쇼맨십으로 나무통을 이용해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직접 만든 도구를 이용해 닭을 비롯한 야생동물을 잡고 식량을 만드는 방법을 ‘시연’해 보였다. 그는 사막에서도 살아남을 적응력을 가진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박수를 쳐야 하나 머뭇거리고 있던 사이, 갑자기 아이타족 민속춤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파란 물감으로 색칠한 기타를 들고 20대 후반의 아이타 청년 둘이 나타나 순식간에 좁은 오두막 공간을 축제 광장으로 만들었다. 그다지 근사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리듬감과 끈질김이 느껴지는 동작이었다.
더는 신비할 것이 없는 현실에서도 수비크는 세상의 신비를 잡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옅은 비가 그친 후 마을은 청명했다. 스페인과 미국이 쥐락펴락했던 필리핀이지만, 어쨌든 본래 자신이 품고 있는 야생성만은 죽지 않고 살아 있어 계속 새로운 모험을 만들고 있다.
클라크·수비크=글 현시원 기자 qq@hani.co.kr·사진 제공 필리핀 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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