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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연습실에 있었어요. 춤추고, 영상 보고, 또 춤추고. 당장 보여주고 싶은 끼는 넘치는데 가수는 멀어 보였고, 힘들었어요. 나중에 빅뱅을 보고, ‘아, 나도 계속 했으면 빅뱅이 됐을까?’ 생각도 해 봤죠.”

국립발레단 남성 솔리스트 윤전일(24)은 연예기획사 와이지(YG) 연습생이었다. 중1 때 텔레비전에서 “에이치오티와 젝스키스를 보고” 가수가 되고 싶었다. 1년 반 동안 고향인 전남 순천과 서울을 일주일에 3번씩 오갔다. 당시 데뷔를 준비하던 가수 세븐, 거미 등과 한 공간에서 연습했다.

낙담 속에 연습실을 나오고도 “무대에서 환호받는 게 좋아서” 친구들과 댄스팀을 꾸려 공연하던 어린 춤꾼은 결국 발레리노가 되었다. 지난달 국립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에서 거친 남성미의 티볼트 역으로 호평을 받았다. 지난해 2월 입단하자마자 6월 롤랑 프티의 <아를르의 여인>에서 “몸에 손댈 때마다 덜덜 떨렸던” 선배 발레리나 김주원의 상대역을 맡기도 했다. 최태지 단장은 “다양한 캐릭터를 잘 이해한다. 테크닉과 음악성, 몸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연기력이 탁월하다”고 그를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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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전일은 또래 단원인 이동훈, 정영재 등과 한국 발레계를 이끌 차세대 스타 발레리노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올해 <지젤>, <왕자 호동>, <돈키호테>, <로미오와 줄리엣> 등 발레단 주요 공연에 출연했고, 다음달 <호두까기 인형>에서는 주인공 ‘프란츠 왕자’로 무대에 선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준비하면서 위에 혹이 생겨 7㎏이 빠지고도 공연을 무사히 끝낸 프로지만, “한번씩 큰맘 먹고 서울 청담동이나 압구정동 클럽에서 춤추는 걸 좋아하고”, “탤런트 유인나를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 ‘그냥 20대’다. 삼촌인 <이끼>의 만화가 윤태호에게 “발레리노 이야기를 그려달라고 했는데 아직 대답이 없다”며 볼멘소리도 살짝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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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 때문에 학교를 자주 빠지던 ‘비평준화 지역’의 중학생은 처음 고등학교에도 못 갈 뻔했다. “선생님들이 ‘인문계는 꿈도 꾸지 말라’고 했고, 실업고, 공고에서도 안 받아줬어요. 그러다 ‘춤 좋아하는 애들이 가는 곳’이란 말에 우연히 예고 시험을 봤어요.”

무용과 학생을 뽑는다기에 힙합 춤을 준비해 간 전남예고 시험장에서 난생처음 다른 수험생들이 입은 발레 타이츠에 경악했다. 고2 때 모교를 찾은 국립발레단 선배의 몸동작에 반해 발레에 눈뜬 얼치기였지만,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 진학한 뒤로 피나는 연습을 거듭하면서 진지한 발레리노로 변신했다. “세련되고 잘 배운 아이들 틈에서 시골에서 온 내가 뒤처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남들이 10시에 연습을 끝내면 12시까지 더 연습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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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동 학교와 발레단 주변만 다니느라 서울살이 7년 동안 “명동, 홍대, 63빌딩”도 아직 못 가 봤다. 하지만 이런 노력 끝에 러시아 바가노바 국제콩쿠르 최우수 2인무상, 독일 베를린 국제콩쿠르 은상 등 유수의 콩쿠르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성장했다.

“맨날 ‘꼴통’ 취급받다가, 발레를 하면서 처음 선생님한테 칭찬을 들었어요. 늘 학교에 오면 머리 숙이던 부모님도 ‘전일이 잘한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셨고요.”

그는 부친이 재혼하며 맞은 새엄마가 고2 때 “공연 의상비 50만원과 ‘꼭 친엄마로 다시 태어나, 더 오래 사랑해주고 싶다’는 다섯통 편지”를 남기고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기억이 무대의 감정 표현에 여전히 영향을 준다고 했다.

그 자신은 탄광촌 출신 꼬마 발레리노 ‘빌리’를 그린 영화 <빌리 엘리어트>가 “내 얘기와는 다르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엿한 발레리노가 된 주인공이 무대에서 날아오르며 끝나는 <빌리 엘리어트>의 뒷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 발레리노의 행보를 눈여겨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박보미 기자 bom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