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연극배우 이경윤(가명)씨: 30살. 계약서 없이 알음알음으로 무대에 서곤 한다. 낮엔 연습, 밤엔 공연하고 아침에 세차 아르바이트를 한다. 서울 대학로 낙산공원 언저리에 마련한 월세 20만원짜리 집세를 내기 위해서다. 밤 10시 넘어서 공연이 끝나고, 오후 5시 극장에 와서 공연 준비를 해야 하는 그에겐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도 별로 없었다. “스타가 되지 않는 한, 연극만 하면서 살 수 있는 환경은 사치”라는 선배들의 말에 막막해질 때가 많다.
#2 영화 스태프 이소연(가명)씨: 25살. 2년 전 대학을 휴학하고 현장에 뛰어들었다. 연출부 막내 스태프로 두달간 일한 첫 상업영화 임금은 80만원. 지난해 5월 석달에 400만원 받기로 계약한 영화가 두달 만에 엎어졌다. 그간 일한 만큼 돈을 달라고 하니, 제작자 쪽은 “안 줄 사람으로 보이냐”고 하더니만 주지 않았다. 임금체불 사실을 서울 고용노동청 쪽에 신고했으나, 스태프를 근로자로 인정하지 않으니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영화산업노조 신문고에 접수해 길고 긴 민사소송의 길을 택했다. 올해 복학한 신씨는 “영화가 좋아 현장에 갔는데, 극장 갈 돈이 없고 임금체불도 겪으면서 자신감을 잃은 게 너무 속상했다”고 했다.
복지 논쟁이 한창인 21세기 한국에서도 최저 생계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예술인들 사연은 여전히 차고 넘친다. 이런 현실에서 생활고 겪는 예술인들을 지원하는 예술인복지법안이 지난 22일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에서 처리돼 6월 국회 통과를 앞두고 있다. 그런데 정작 문화예술계의 시선은 착잡하다. 근로계약서 등으로 고용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 예술인들은 고용·산재보험 적용을 받을 길이 열리지만, 고용 계약 없이 개별 창작 활동을 하는 다수 예술인들은 배제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기 때문이다.
법안은 예술인을 창작, 실연, 행정·기술 스태프 등의 방식으로 참여하는 자와 향후 대통령령이 정할 기준에 따라 문화예술 활동을 증빙할 수 있는 자로 규정했다. 근로자와 유사한 노무를 제공하는 예술인을 근로자로 간주해 고용·산재보험의 적용을 받을 수 있게 하고, 빈곤층 예술인 등을 지원하는 복지재단을 설립하는 것이 뼈대다. 12개월 동안 최소 90일 이상 고용관계를 유지한 예술인에게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국회 문방위 최선영 입법조사관은 “혼자 그림 그리거나 글을 쓰는 등의 예술인이 아니라 계약서를 쓰고 일정기간 고용된 예술인을 근로자로 간주한다는 게 법안 취지”라고 설명했다. 이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 근로계약서가 보편화된 영화계 스태프들 상당수는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법안은 그간 국회에 계류 중이던 4개의 예술인복지법안을 토대로 문방위 위원장이 제안한 대안법안을 여야가 합의한 것이다.
그러나 문화예술계에서는 극히 일부만 혜택을 받을 것이라는 점에서 미봉책이란 비판이 적지 않다. 음악, 미술, 연극, 문학 등 대부분 장르 예술인들이 계약서를 쓰지 않고 활동하는 저임금 ‘프리랜서’들이어서 지원의 사각지대가 클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무명 작가나 예비 감독 등 복지 혜택이 가장 절실한 이들의 경우 예술활동을 증명할 근거자료도 마땅치 않다. 정부도 현재 54만명으로 추산되는 국내 예술인 중 계약서를 작성해 근로자로 규정할 수 있는 예술인은 5만7000명 정도로 추정한다.
클래식 작곡가 이나리메씨는 “음반 실적이나 발표회 실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지만 가난한 젊은 작곡가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박계배 한국연극협회 이사장도 “연극인 대다수가 너무 빈약한 출연료를 받는데 계약서를 써봐야 소용이 없다고 판단해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걱정했다.
이 때문에 일괄적인 지원 기준 대신 예술영역별 특성을 고려해 법안을 보완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박 이사장은 “연극계만 해도 1년에 90일 이상 종사해야 고용보험 등의 적용을 받을 수 있다는 법안 기준에 부합되는 장기 출연 배우들이 드물다”며 “장르별 특성에 맞게 (예술인이자 근로자임을 증빙할 수 있는) 조건들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와 별개로, 기획재정부와 고용노동부 등의 정부 부처와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등은 다른 취약계층 노동 종사자와의 형평성 문제, 국고 과다 지출 등을 들어 일종의 ‘포퓰리즘’이라며 법안 자체에 반대의사를 밝혀왔다. 실제로 법안이 국회 문방위를 통과한 다음날인 23일 고용노동부 쪽은 기자간담회를 열어 “예술인 고용보험 편입은 방법론상 부적절하다”는 주장을 폈다. “다른 직종 노사가 부담한 고용보험료로 예술인을 지원하는 것인 만큼 노사단체 등의 의견 수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업급여 지급액만 최소한 연간 약 200억∼250억원에 달하고, 소수 예술인들을 돕기 위해 다수 일반 근로자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결과가 초래된다는 게 주된 논리다. 그러나 노동부, 경총 등의 반발은 예술 생산의 공공적 가치를 인정하려는 법안 취지에 부정적 인식을 깔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의 공익성을 폭넓게 수용하며 예술인 복지를 확충해온 선진국들의 정책 흐름과 역행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대훈 영화산업노조 국장은 “앞으로 나올 대통령령에서 예술인 자격 등을 어떻게 정할지에 대해 정부와 예술인들 사이에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송호진 정상영 박보미 기자 dmzs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