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온’과 제도권의 길항 ‘다큐성 픽션’으로
6개 에피소드…현실과 초현실 서늘한 교감
신라 오악, 풍수지리로 본 4대 한국 명산, 큰 변란을 피할 수 있다는 십승지지 가운데 하나.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하려던 곳. 충남 계룡산과 그 산이 품에 안은 신도안 일대를 이른다.
“저녁 무렵 공주쪽에서 바라본 계룡산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까닭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알고보니 사연이 많은 종교 중심지더라.”
아틀리에 에르메스에서 8월17일까지 여는 박찬경 개인전 ‘신도안’은 박찬경(43) 작가의 신도안에 대한 1년 반짜리 연구보고서다. 상영시간 45분의 비디오 작품이다. 신도안 관련 기록사진, 영화, 텔레비전 영상, 정부 선전물과 자신이 석 달에 걸쳐 촬영한 것을 엮은 팩션, 곧 다큐멘터리 성격을 띤 픽션이다.
“사이비 종교의 총본산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제도권의 종교·과학·국가의 힘에 밀려난 재래의 기층문화가 보이더라.” 작가는 이를 ‘계룡산 문화’라고 불렀다.
임진왜란과 일제 식민지, 한국전쟁 등 나라가 제구실을 못할 때 민중들은 이곳으로 스며들었다. 그들만의 종교공동체에서 전쟁과 폭력, 가난과 불평등과 질병이 없는 이상향을 꿈꿨다. 3·1독립운동 직후에는 임시정부가 그곳에 들어선다는 소문도 돌았다. 제도권 종교와 권력에서 볼 때 이들은 불온세력이었다. 조선총독부, 새마을 운동의 박정희 정권, 군사도시의 전두환 정권은 그곳에서 종교시설을 헐고 사람들을 몰아냈다. 사이비 정화, 자연보호 등의 명분이었다.
작품은 삼신당, 영가무도, 기념촬영, 시천주, 쿠베라, 연천봉 등 6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다. 각각의 소주제들은 모두 현실과 초현실이 뒤섞인 게 특징. ‘삼신당’에는, 산신이 몸속으로 들어와 병을 고쳐주게 되었다, 교주가 독립운동가를 숨겨줬다가 고문을 받아 죽었다, 그 때문에 계룡대가 들어서면서도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가 담겼다. ‘영가무도’는 최제우·김광화와 함께 같은 스승한테서 배운 김일부(김항)가 만든 종교로, 신도들은 그들의 구음과 춤의 기원을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두고 있다. 교주가 만든 ‘정역팔괘

도’는 계룡대 3군본부의 팔각형으로 계승됐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쯤에서 팩션(역사적 사실에 허구의 내용을 더한 이야기) 형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처지가 드러난다.
‘기념촬영’은 조선총독부가 이 일대를 조사하면서 찍은 사진들, 각종 종교단체들의 계룡산 수련회 기념사진들, 박정희 정권의 ‘미신타파’ 당시의 사진들, 계룡대 예정지의 건물-원주민들의 사진 등으로 구성돼 있다. 주민들에게 각종 권력의 진입과 자신들의 퇴출은 말세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기념사진에는 후천개벽 전야를 맞은 비장미마저 감돈다. 나라의 운명과 배후의 큰손이 바뀜에 따라 작품의 내레이션은 일어, 영어로 바뀐다.
‘시천주’와 ‘쿠베라’를 거쳐 ‘연천봉’에 이르면 완전 픽션이다. 미래의 어느 날 살아남은 5명의 남녀가 계룡산 연천봉에서 제천의식을 한다. 대홍수를 겪었음직한 이들은 물갈퀴와 물안경을 쓴 채 손을 맞잡고 거석 주변에서 원무를 춘다. ‘미래의 어느 날’이 픽션과 다큐의 경계선임은 분명하지만 그 시점을 어디에서 끊어도 무방하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부역에다 세금을 꼬박꼬박 바친 민중에게 닥친 두 차례의 왜란, 서양 세력의 농간에 수백만이 죽어간 전쟁, 총칼 독재가 수십년 군림한 것 등 도무지 소설 같지 않은 상황이 없지 않은가.
<블랙박스 냉전 이미지의 기억, 1997>, <세트, 2000> <파워통로, 2004> <비행, 2005> 등 냉전과 분단을 이슈로 허구와 다큐를 넘나들며 작업을 해 온 작가가 관심사를 긴 역사의 끄트머리까지 늘인 결과가 이번 작품이다. 계룡산을 빌려 외세든 외세를 업은 권력이든 제도권과의 줄다리기 속에서 명멸해 간 사람들에 대한 살풀이 춤이다.
“민중미술의 바탕은 해원과 상생이다. 내 작품에는 신학철의 <모내기>나 민정기의 <포옹>의 정신이 그대로 들어 있다.” 실제로 <신도안> 끝 무렵에는 <포옹>과 흡사한 포옹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민중미술이 부활한 듯한 환각.
그런데 영상작품을 화랑에서 상영하는 까닭은 무언가? “회화, 조각, 비디오 등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주제가 무엇인가에 따라 장르를 선택할 뿐이다.”
자막 배경으로 깔린 <보리밭>의 가사가 서늘하다. 보리밭 사잇길.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돌아보니 고운 노래 빈 하늘만 눈에 찬다는 ….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사진 에르메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