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베이징

열하일기 1·2·3(개정신판)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돌베개·각 권 3만원

2009년에 ‘새 번역 완역 결정판’ <열하일기>를 내 호평을 받았던 김혈조 영남대 교수(한문교육과)가 8년 만에 다시 ‘개정신판’ <열하일기>를 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2012년에 영인돼 학계에 공개된 한문학자 이가원(1917~2000) 소장 ‘연암 관련 필사본 총서’에 포함된 <열하일기> 초고본과 초고본계열의 책들에 대한 연구였다. 단국대에 기증된 그 필사본 총서를 통해 2009년판과의 차이점들이 다수 확인됐을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출간된 필사본과 이를 토대로 한 활자본 등 수많은 <열하일기> 이본들이 “본래 모습에서 어떻게 변질되고, 훼손됐는지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고 김 교수는 밝혔다.

광고
베이징으로 가는 조선 연행 사신단의 모습. 1780년 6월부터 약 6개월간 청 건륭제 70회 생일 축하 연행사절단의 일원으로 선양
베이징으로 가는 조선 연행 사신단의 모습. 1780년 6월부터 약 6개월간 청 건륭제 70회 생일 축하 연행사절단의 일원으로 선양

“그리하여 연암이라는 인물의 연암다운 개성을 몰각시키고 오직 점잖고 교양있는 양반의 모습으로 분식했다. 봉건 유교 윤리 속으로 연암의 실제 모습을 숨기는 분식은 연암의 개성을 말살하여 평범한 인간 형상으로 조작하는 행위다. 이 조작은 창조적 인간 유형인 연암을 고루하고 퇴영적인 양반의 전형으로 만들었다. 문맥 속에서 살아 숨쉬는 인물이 아니라, 박제된 인물로만 남게 된다.”(개정신판 서문)

광고
광고

재기발랄하고 시속에 얽매이지 않는 파격적 사상과 표현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기왕의 여러 공간 <열하일기>들이 만들어온 연암 이미지도 연암 자신이 쓴 초고본과 당대 그의 주변인들이 옮겨 적은 초고본계열 필사본들과 대조하는 순간 고루와 퇴영의 박제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는 얘기다. 해방 뒤 처음으로 열하일기 일부를 번역했던 <역사 앞에서―한 사학자의 6·25일기>의 저자 김성칠(1913~1951)도 연암의 글을 두고 ‘혜성의 광망(光芒, 빛살)’이라며 극찬했는데, 그 글들이 “교정(校正)이란 여과지를 거침으로 하여 아주 하품 나는 글이 되고 말았고”, 소심한 문인·후손들의 교정으로 “모처럼 생동하는 개성의 광망이 무참히도 말살되고, 판에 박은 듯한” 문집들이 생산되었다고 개탄했다.(‘옛사람의 문집교정―열하일기의 경우’, 1949년)

연암 박지원. 휴머니스트 제공
연암 박지원. 휴머니스트 제공

광고

김 교수가 개정신판을 낸 것은, 말하자면 자기검열과 의도적인 수정·삭제, 무지 등으로 말미암아 고루·퇴영·박제된 지금까지의 여러 이본들 속의 연암을 원본 또는 본래에 가까운 <열하일기> 재구성을 통해 혜성처럼 빛나는, 호방하고 창조적인 연암 본색으로 되살려내기 위해서다.

김 교수의 2009년판 번역 저본은 일제 강점기인 1932년에 공간된 <연암집>에 들어 있는 <열하일기>다. 그 연암집은 원저자 연암 박지원(1737~1805)의 북학파 계열 실학자 서유구(1764~1845)의 당호가 붙은 ‘자연경실’본을 저본으로 박영철(1879~1939)이 펴낸 문집(‘박영철본’)이었다. 이 박영철본을 번역 출간할 때 김 교수는 새 번역서를 내는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기존의 번역서에는 오역과 밝히지 못한 전고가 많아서 원작의 내용을 왜곡한 경우가 있다. 또한 주석 없이 그대로 사용한 생경한 단어나 시대감각이 떨어지는 낡은 표현 등은 한글 세대와 전문가 모두를 아우르는 고전이 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다. 이는 연암의 진정한 모습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그와의 소통을 방해할 뿐이다.” 그래서 원작에 충실하면서 완성도 높은 번역서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그때의 저본인 박영철본이 지닌 장점으로 활자로 간행돼 비교적 널리 유포돼 읽히고 있고 고전번역원에서도 텍스트로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해 두고 있으며, 연암의 연행 과정의 시간 동선이 정본에 가깝다는 점 등을 들었다.

베이징에서 열하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만리장성. 돌베개 제공
베이징에서 열하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만리장성. 돌베개 제공

광고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박영철본은 원저자 또는 필사자들의 자기검열 등에 따른 윤색이나 수정·삭제 과정을 여러차례 거친 사실이 이가원이 소장했던 초고본이나 초고본계열 필사본들과의 대조를 통해 확인됐다.

연암의 나이 44살 때인 1780년, 청 건륭제 70회 생일 축하사절에 끼여 그해 6월부터 5개월여에 걸쳐 선양과 베이징, 이궁인 열하 등을 돌아본 뒤 1783년에 탈고한 <열하일기>는 그 파격적인 문체와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분방한 사고와 예리한 관찰, 깊은 성찰로 탈고 전부터 여러 편편들이 필사본으로 나돌았고 정조까지 깊은 관심과 함께 그 내용과 형식의 파격에 우려를 표명한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필사본이 제작됐지만 필사자들은 일종의 자기검열을 통해 원본의 일부를 수정·삭제·교체했으며, 왕을 비롯한 그 시대 지배세력의 견제와 탄압을 두려워해 활자인쇄본은 찍어내지도 못했다. 당대 지배세력 다수는 <열하일기>가 그들이 ‘오랑캐’로 멸시한 만주족의 청나라 연호인 ‘건륭’ 등을 썼다는 이유로 ‘노호지고’(虜號之稿, 오랑캐 연호를 쓴 글)로 폄훼, 배척했으며, 필사를 할 경우에도 청은 그렇게 멸시하면서 당시 망한 지 이미 150년이 지난 명에 대해서는 원문엔 없는 황명(皇明)이니 유명(有明) 등의 극존칭을 수식어로 덧붙였다.

라마교 사원 양식을 본떠 지은 열하의 건물들. 돌베개 제공
라마교 사원 양식을 본떠 지은 열하의 건물들. 돌베개 제공

그런 시대 상황 아래에서 <열하일기> 첫 활자본이 나온 것은 1911년이며 일본어 완역본이 나온 것은 1915년. 1932년에 나온 활자본 박영철본은 전남대본·중화총서본(대만본)과 함께 그 개작 정도가 광문회본, 서울대 고도서본, 규장각본, 충남대본 등의 필사본들에 비해서도 좀 더 심한 편에 속한단다. 1801년의 신유사옥을 거치면서 천주교나 서양에 관한 기술 등에선 연암 자신이 초고를 수정·삭제하는 자기검열을 하기도 했다.

이가원의 ‘연암 관련 필사본총서’에는 아직 학계에 별로 소개되지 않은 연암 친필 초고본과 이본인 옥류산장본, 만송문고본(고려대본) <열하일기>가 들어 있는데, 이들 이본은 친필 초고본 다음 단계의 저본을 필사한 책으로, 친필 초고본과 거의 같은 내용이어서 완전본이 없는 초고본의 부족분을 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2017년 개정신판 <열하일기>는 이들 초고본과 두 초고본계열 본들을 박영철본과 대조하면서 수정·보완해 “거의 완벽하게 복원한”, 원본에 가장 가까운 <열하일기>다.

조선 연행 사신단 일행들이 자주 찾은 베이징 유리창의 현재 모습. 돌베개 제공
조선 연행 사신단 일행들이 자주 찾은 베이징 유리창의 현재 모습. 돌베개 제공

김 교수는 개정신판 작업에서 연암과 수많은 필사자들의 자기검열로 인한 윤색, 왜곡 등에 주목했다. 특히 더 나은 쪽으로 개작되기도 한 저자의 수정·보완보다는 거의 예외없이 ‘개악’돼 “이 위대한 고전을 범속하게 만든” 필사자들의 수정·삭제·교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가 서문에서 제시한 ‘개악’의 대표적인 사례는 시대착오적인 숭명반청(崇明反淸) 의식 때문에 명·청의 국호나 연호를 청은 비하 쪽으로 명은 숭상 쪽으로 변개하고 명에 불리한 내용까지 삭제하거나 바꾼 것, 우리 일상의 말을 살려서 이두식 한자로 전환해 자주 사용한 것을 굳이 정통 한문식으로 다시 바꾼 것, 천주교 및 서양과 관련한 용어나 여성이나 성에 대한 분방한 묘사처럼 당대 양반 체통이나 사고, 행동, 풍속, 사회적 통념에 맞지 않는 연암의 자유분방한 표현(문체) 또한 수정·삭제하거나 정통 고문체로 바꾼 것 등이다.

베이징 유리창 인근의 양매죽사가. 돌베개 제공
베이징 유리창 인근의 양매죽사가. 돌베개 제공

“알아서 기는” 자기검열의 칼로 펄펄 살아 있던 연암의 초시대적 이용후생과 창의의 싹을 잘라내 고루한 박제로 만들어버린 당대 주류의 시대착오적 숭명반청의 퇴영 기제는 지금도 형태를 달리해 작동하고 있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전시작전통제권 반환 결사반대, 전 주한미국 대사 피습사건 뒤 ‘석고대죄’ 운운한 소동, 그리고 최근의 ‘태극기 부대’를 그는 떠올렸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