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노래로도 만들어진 <향수> 등을 통해 정지용(1902~1950·사진)은 그간 서정시인으로만 알려져 왔다. 최근 정지용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일본에서 새롭게 발굴됐다. 그의 시가 10편 이상 한꺼번에 발견된 것은 1988년 정지용 시전집 간행 뒤 처음이다.

이번에 발굴된 작품은 정지용이 교토 유학 시절인 1920년대 중반 일본 시 동인지 등에 발표한 일본어 시 36편과 산문 3편, 번역시 1편. 이 가운데 다른 지면에 일본어나 한국어로 발표된 시 25편을 제외한 15편은 완전히 새로운 작품이다. 이 중에는 나라 잃은 백성의 우울과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강하게 드러낸 작품이 상당해 정지용의 문학 경향을 ‘순수문학’으로 분류해 온 기존의 평가를 수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작품들의 존재는 지난 5일 일본 니가타현립대학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엄 ‘식민지 조선의 문학·문화와 일본어의 언설공간(2)’에서 공개됐다. 일본의 한국문학 전문가인 구마키 쓰토무 후쿠오카대학 교수가 교토에서 발행됐던 시 동인지 <자유시인> 1925년 12월치와 1926년 4월치 및 정지용이 유학 중이던 도시샤대 학생들이 만든 <도시샤대학 예과 학생회지> 1925년 11월치 및 1926년 2·4·6·11월치에서 정지용의 미공개 작품들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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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유머러스한 몸짓에 가려진 슬픈 체념을 드러낸 시 <채플린 흉내>와 ‘일본의 이불은 무겁다’ 같은 글이 포함된 산문 <센티멘털한 독백>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자학적인 슬픔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앞으로 정지용 문학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작품”이라고 구마키 교수는 평가했다. ‘일본의…’는 “어울리지 않는 기모노를 입고 서툰 일본어를 지껄이는 내가 참을 수 없이 외롭다”로 시작한다.

<향수> 외에도 <카페 프란스> <유리창 1> <백록담> 등의 시로 잘 알려진 정지용은 이상·박태원·이태준 등과 함께 1930년대 모더니즘 동인 구인회에서 활약했으며 잡지 <문장>을 통해 청록파 시인 박목월·박두진·조지훈을 발굴하기도 했다. 1950년 한국전쟁 뒤 북한에 간 그의 작품은 오랜 세월 공개언급이 금기시되다가 1988년 납·월북 문인 작품 해금을 계기로 일반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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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채플린 흉내- 정지용
채플린을 흉내내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다.
모두가 와르르 웃었다.
나도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 가지 않아
엉덩이가 허전해졌다.
채플린은 싫어!
화려한 춤이야말로
슬픈 체념.
채플린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