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권우 도서평론가·한양대 특임교수
이권우 도서평론가·한양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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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최장집 지음/폴리테이아·1만원

나는 어찌하다 책 읽는 사람이 되었을까. 문화환경이 오늘과 달랐다는 점을 들 수 있을 터다. 텔레비전도 귀했던 시절이라, 라디오를 벗하며 살았다. 라디오는 책과 친근감이 높다. 음악 들으며 책 읽은 경험을 떠올리면 된다. 그 덕분에 책읽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형편이 어렵고 모자란 것이 많은 시절에 유년기를 보낸 덕도 있는 듯싶다. 골방에 갇혀 벗할 수 있는 매체로 책만 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재미로 읽다 보면 어느새 자유로운 상상세계를 거닐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책 읽는 사람이 되는 필요조건이었다면, 청년시절의 경험은 충분조건이었다. 엄혹한 1980년대를 보내며 내가 발 디딘 현실에 의문을 품었고, 동의할 수 없는 현실을 넘어설 대안을 고민했다. 그 의문과 고민은 집단적이었으니, 책 읽고 토론하고 글 쓰는 훈련을 스스로 해낸 세대였다. 책 읽는 사람이 되면, 책에서 절대 멀어질 수 없다. 삶의 고통스러운 순간을 이겨내는 지혜도 책에서 찾게 마련이며,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에 이르는 방법도 책에서 모색하는 법이다. 책에 길이 있다는 말을 온몸으로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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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 읽으며 성장했고 성숙해졌는데, 세상은 어찌 되었을까. 최장집의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을 읽으며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책 읽으며 행복하고 즐거워하는 동안 세상은 숱한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다. 노정치학자가 현장에서 만나본 노동자들은 “상실된 희망과 감춰진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왜 아니 그러하겠는가. 내가 책이라는 안전지대에 머물 동안 해고된 노동자는 자살하거나 크레인에 올라갔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에 무감한 세상에 마지막으로 보내는 하소연이었다.

지은이가 책 앞부분에서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에게 어떤 실체적 혜택을 주었고, 이들을 위한 정치의 세계를 확장하는 데 무엇을 기여했는가”라고 묻는 대목에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책 읽어 진리를 알고 진실을 확인했고 바람직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해하고 분석하는 세계에 머물고 변혁하는 자리에 나아가지 못했다. 나는 “공허한 담론과 추상적 이념의 언어가 지배하는 곳”에 있었다. 거기는 지은이가 우리 민주주의를 수렁에 빠뜨린 중요한 원인으로 지적한 “과잉 이념화된 사고방식과 도덕적 우월의식”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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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의 지적대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지난 시절, 우리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의 실현을 희구한 것은 “그것이 다른 체제보다 보통 사람들의 삶의 질 개선을 포함하는 시민권을 확대하고 실현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책에 나온 한 외국 학자의 말대로 우리 사회는 “살인자적 자본주의”가 되고 말았다. 지은이는 노동의 정치세력화가 실패한 데서 그 원인을 찾는다. 결국 우리 사회의 위기는 대의되지 않는 대의민주주의에서 비롯되는 듯싶다. “더 중대한 사회경제적 갈등이나 이익들이 존재하며 따라서 마땅히 이슈화되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책에 ‘사회적 시민권’이라는 대안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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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의 배려로 긴 세월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두루 감사한 일이다. 한낱 책벌레인지라 세상을 바꾸는 데 힘을 보태지 못했고, 오늘 우리 공동체의 상처를 낫게 하는 데 이바지한 바는 없으나, 책 함께 읽으며 어찌해야 함께 사는 세상을 이룰 수 있는지 고민해보자 권유해왔다. 아마도 책벌레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인 듯싶다. 그럼에도 질문하고 성찰하는 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구차한 변명이지만, 아직도 내가 책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권우 도서평론가·한양대 특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