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해도 괜찮아〉
〈불편해도 괜찮아〉

〈불편해도 괜찮아〉
김두식 지음/창비·1만3800원

인권이란 단어와 우리와의 거리는 이중적이다. 내 자식, 내 집, 내 인격을 건드릴 때만 그 단어의 절박성이 가동된다. 남의 것일 때는 내 것을 빼앗기지 않는 데까지 유효하고, 내 안에 들어오지 않는 선까지 품위가 있다. 꼭 둘로 쪼개지지는 않더라도 인권을 바라보는 우리 시각은 복잡하고 중층적이다. 종교의 권리를 인정하지만 총을 거부하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군대에 가지 않는 이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동성애가 우리 사랑과 뭐가 다르냐고 하면서도 동성끼리 몸을 섞는 영화장면은 견디지 못한다. 뭉개지는 학생 인권을 개탄하면서도 내 아이 염색한 머리나 짧아지는 치마를 보면 다시 학교를 쳐다본다. 깊이 박힌 이기적 유전자를 다스리기 어려운 우리가, 나와 남의 경계가 없는 인권의 보편성을 가슴으로 획득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인권활동가이자 법학자인 김두식 교수는 그 고백으로 입을 연다. 한 법대에서 강의를 할 때였다. 끝자락에 “여러분이 사법연수원을 마칠 때쯤이면 다수가 마담뚜의 도움을 받아 아내를 얻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여기 앉아 있는 법대생의 40%가 여학생인데요”라고 했고, 그제서야 “청중의 절반 가까이를 투명인간 취급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내 또래에 나만큼 의식이 깬 남자도 없다”는 자만심은 여지없이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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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외국인노동자도, 여성도 동성애자도 아니다. 그의 종교는 병역을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늘상 그들을, 그들의 인권을 이야기한다. 그게 두렵다. 내가 그들이 아니니 그들이 던지는 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안으로 숨는 고통의 파동을 느끼지 못한다. 세상은 형법을 가르치는 한 교수가 인권을 말한다고 대견해 하지만, 자신은 딱 거기까지다.

그가 쉼 없이 그들을 만지는 감성의 촉수를 가다듬는 이유다. 그는 <불편해도 괜찮아> 서문에 “새로운 불편을 느끼기 위하여”라고 적었다. 그가 ‘인권 감수성’을 키우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앵무새 죽이기>의 주인공 애티커스 핀치의 말 “입장 바꿔 생각해 봐“이다. 영화나 드라마는 좋은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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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무혁(소지섭)은 애인 지영(최여진)이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려 하자 지영을 억지로 차에 태우고 난폭하게 질주한다. 해안가 절벽에 차를 세우고 “같이 죽자. 저승에서 보자”고 울부짖는다. 애절한 사랑이 화면에 가득 찼을 때 그가 든 생각. “혹시라도 내 딸이 저런 놈과 사귀게 되면 어쩌지?” 그 생각에 잠도 오질 않았다고 했다. 검사 시절 ‘명문대’ 출신 두 남녀의 비슷한 사건을 다뤘는데, 폭력으로 시작해 폭력으로 끝났다. 이가 두 개나 부러진 여성이 상해죄로 남성을 고소했고, 남성이 용서를 빌자 여성은 고소를 취하했다. 그러자 이번엔 남성이 진단서 끊어 여자를 고소했다. 이런 게 현실이다. 폭력은 폭력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자동차에 강제로 태우는 사람은 사귀지 말고 따귀 때리는 사람도 빨리 정리해라.…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지 주먹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 <날아라 펭귄>에서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을 둔 엄마(문소리)는 직장에선 ‘요즘 엄마’들의 극성을 한탄하고 아이들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386 지성인’이다. 집에서는? 자는 아이 깨워 영어책 읽게 하고, 집에선 영어만 쓰게 하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극성엄마다. 엄마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착한 아들은 사실 쉬는 시간 이유 없이 허브 가지를 분지르고, 거북이를 아파트 베란다에서 떨어뜨리는 아이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 이 아이처럼 많은 아이가 부모의 미망으로, 교육의 이름으로 영혼이 병들어 간다. 부모나 학교나 아이들의 염색한 머리나 짧은 치마를 용서하지 못한다. 교문 앞에서 머리 자르고, 치마 자른다고 아이들의 욕구는 사라지지 않는다. 놔두면 1~2년 안에 지나갈 수 있는 것을 억지로 누르니, 30~40년 동안 사춘기를 겪는 어른이 생긴다. “청소년기에 머리 처박고 공부만 한 다음, 남은 평생을 그 억제된 에너지를 몰래 분출하는 데 쓴다. 교육정책도 그런 사람이 수립하고, 법도 그런 사람들이 만든다.” ‘다 너를 위해서’라는 이름으로 우린 너무 많은 걸 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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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300>에서 스파르타 전사들과 싸우는 상대 페르시아군은 괴물로 묘사된다. 감독이 만든 그런 이미지로 타자화한 적은 소나 닭처럼 죽어나가도 관객은 부담이 없다. 강한 스파르타 전사를 키우기 위해 장애아를 죽이는 스파르타식 전통에도 무감각하다. 영화는 우월하고 건강한 인종의 지배를 꿈꾸던 히틀러의 망상을 떠올리게 한다. 히틀러는 많게는 2만5천명의 독일인 장애아의 목숨도 빼앗았다. “스파르타나 히틀러의 그것은 우리가 기형아를 낙태시키는 행동과 무엇이 다를까?”

세상사 단순한 것은 없다. 인권을 보는 우리 시선도 마찬가지다. 한쪽이 옳다가도 다른 쪽 얘기를 듣고 나면 머리가 아프다. “법에선 의심스러울 때 피고인의 눈으로 보라는 말이 있다. 의심스러울 때는 약자의 이익으로 보라.” 인권지킴이, 그의 조언이다.

함석진 기자 sjha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