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깝다 이책
윤구병 선생님 앞에는 여러 이름표가 붙습니다. ‘전 뿌리깊은나무 편집장’, ‘전 대학 철학교수’, ‘어린이 창작 그림책 및 출판 기획자’, ‘문명 비평가’, ‘변산 농부’, ‘실험학교 교장’…. 마치 달빛이 강물에 여러 모습으로 비치듯이. 어느 하나 버리고 싶지 않은 단단하고 뚜렷한 시대의 표상 같은 이력입니다. 이중에서 하나를 짚으라면 ‘철학자’라고 말하겠습니다.
윤구병 선생님은 ‘철학자’입니다. 전공이 철학이고 한 때 철학 교수로 밥먹었기에 철학자라고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를 변혁하는 실천의 무기로서 철학‘하는’ 철학자입니다. 앞에 쓴 경력은 윤구병 선생님의 철학‘함’의 열매이고 살아온 길입니다..
윤구병 선생의 존재론 강의 <있음과 없음>은 무척 난해한 책입니다. 이 책은 윤구병 선생님이 대학 철학교수 직을 그만둘 즈음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생들에게 강의한 것을 풀어서 철학 전문지 <시대와 철학>에 연재했던 것입니다. 이 세계와 존재에 대한 아주 치밀한 ‘변증’이 ‘우리말로 사유하기’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세상 속으로 깊게 닺을 내리고 있는 윤구병 선생님의 사상적 뿌리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에는 무수한 강단 철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풀어 놓은 지식보따리에는 외국의 철학이론들이 미처 소화되지 않은 채 ‘끼리끼리 나누는 담론’으로 떠돕니다. 강단 철학은 철학을 지상에서 천상으로 끌고가, 철학을 ‘관념의 유희’로, ‘품위 있는 직업을 얻기 위한 자격증’으로 떨어뜨려 삶과 현실에서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책은 ‘우리말과 글로 우리 땅에서 철학하기’의 이정표를 세운 책입니다.
이 책은 의외로 가방 끈이 짧은 사람들이 쉽고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합니다. “존재론이란 게 별 것 아니네. 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게 존재론 아녀. 있어야 될 것이 뭔지, 없어야 할 것이 뭔지 알아서, 있어야 될 것을 있게 만들고 없어야 될 것을 없게 만들자는 게 윤구병 존재론 강의의 알맹이야.”
결가부좌하고 손가락에 염주알 끼고 돌린다고 뭔가 ‘앎’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 ‘여럿’ ‘있는 것’ ‘없는 것’ ‘있을 것’ 없을 것’ 같은 어려운 철학 개념들이 낱줄과 씨줄로 빼곡히 직조되어 있는 이 책은, 우리가 사는 세상살이의 모순과 전망에 견주어 볼 때 광채가 드러납니다.
천성산에 도룡뇽이 사는 것(있는 것)은 분명하고 터널이 뚫리면 도룡뇽이 죽는 것(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새만금을 막으면 갯벌이 사라지고(없는 것) 갯것들이 죽는 것(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있어야 할 것은 도룡뇽이고 갯것들입니다. 지율 스님의 단식과 문규현 신부님의 삼보일배는, 있어야 할 것을 있게 만들기 위한 싸움입니다. 세상의 모순과 고통에 눈감아버리고 존재론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한가한 사람들의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이 책은 말합니다. ‘앎’은 ‘함’과 ‘됨’과 하나될 때 진정한 깨우침이 됩니다.
철학은 당파적 세계관입니다. 있는 것을 없다고 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우기는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 책을 이해 못합니다. 있어야 할 것(사회정의와 공동선)을 있게 만드는 사람들, 없어야 할 것(거짓과 부정의)을 없게 만드는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책은 ‘앎’과 ‘함’과 ‘됨’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소중한 길잡이가 되서, 창고에 누워있는 책들이 햇빛을 볼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어봅니다.
정낙묵/보리 출판사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