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계실 때 하지 못했던 말故 조규갑

살아계실 때 하지 못했던 말

사랑하는 아버지께,

세월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흘러갑니다. 아버지와 그렇게 이별을 한 후 2년이 넘는 시간이 훌쩍 흘렀네요. 늘 그러셨던 것처럼 여전히 우리 가족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계신가요? 지금까지도 그날의 상황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으니 아직 아버지를 마음에서 완전히 보내드리지 못했나 봐요.

돌아보면 너무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정신없이 아버지를 보냈던 것 같아요.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대구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자책과 원망이 수시로 교차했어요. 신천지 사태로 한참 코로나 유행이 확산되고 있었던 때, 대구에 계신 아버지, 어머니를 왜 빨리 서울로 모시지 않았을까요? 코로나 확산 이후 수시로 통화하며 조금이라도 불편한 점 있으면 바로 병원으로 연락하라고 신신당부를 드렸는데, 바이러스가 아버지의 신체를 훼손할 때까지 왜 그리 무심하셨나요? 작별 인사조차 못하고 아버지를 보내야 했다는 회한에 제 마음은 온통 멍들었어요.

코로나 유행이 한참 확산일로에 있던 때였기에 제대로 된 장례 절차조차 밟을 수 없었어요. 코로나로 돌아가신 경우 장례 절차 없이 곧바로 화장으로 보내드려야 했어요. 그것도 일반 화장이 끝나고 오후 5시 이후가 돼서야 가능했죠. 하루라도 빈소를 마련하고 싶어 아침 일찍 장례식장 한켠을 얻었지만 외부 조문을 받기도 어려웠죠. 어머니까지 확진으로 판명되어 장례식장에는 오시지도 못했고, 동생과 단 둘이 아버지를 모셔야만 했어요.

화장장에 가서야 겨우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잠깐 뵐 수 있었어요. 저의 신체를 방호복으로 꽁꽁 싸매고 나서 뜨거운 불길로 향하는 아버지를 아주 짧게 뵐 수 있었지요. 영면에 드신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 낯설었어요. 그제야 아버지가 돌아가셨구나, 저 잠드신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겠구나, 생각하니 참았던 눈물이 펑펑 쏟아졌지요. 그리고 얼마 후 한줌 재로 변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어요.

3월 초라 겨울은 다 지나갔는데 선산의 바람은 차갑기만 했어요. 그래도 아버지가 묻히시는 곳은 따스한 햇살이 스며드는 곳이었네요.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를 찾을 때 무심코 지나쳤던 광경들이 하나하나 각인되는 느낌이었어요. 겨우 1m 깊이의 땅을 파고 아버지의 유골함을 모셨지요. 그렇게 그 차가운 땅속에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왔네요.

3장

아버지, 금방 사라질 줄 알았던 코로나는 그렇게 끈질기게 우리를 괴롭히더니, 아버지와 이별하고도 2년이 훨씬 지나서야 조금씩 그 힘을 잃어가네요. 그리고 그토록 기다리던 소중한 일상회복에 한발씩 다가가고 있어요. 우리 가족 모두도 각자의 자리를 잘 지키고 있지요. 코로나 확진으로 한 달 넘게 병상에 계셨던 어머니는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셨죠. 중증으로 발전하는 위기까지 갔었지만 다행히 의료진들이 잘 돌봐주셔서 회복의 단계로 갈 수 있었어요. 아버지께서 코로나로 돌아가셨던 까닭에 더더욱 신경써서 진료해주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도 지켜주셨기 때문에 회복이 가능했다고 말씀하시곤 하세요. 오랜 시간을 함께한 아버지와의 이별이 많이 힘드셨을 텐데도, 어머니는 내색 한번 않고 잘 이겨내셨어요. 아마 자식들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으시기 때문이겠죠.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매일 아침 함께 탁구를 치러 다니시기도 했는데, 지금은 운동 파트너가 없으니 서운하시겠죠. 그래도 워낙 긍정적인 분이라 걱정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저 역시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코로나 확진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의 코로나는 아버지 때의 코로나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심한 증상 없이 일주일의 격리로 다시 일상을 되찾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여전히 정신없이 일상의 틀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아버지를 생각하는 시간은 옅어지고, 그렇게 제가 불효자였다는 것을 확인하곤 하지요. 그래도 여전히 제 방 한켠에는 아버지의 사진이 걸려 있어요. 장례식 때 영정으로 썼던 사진이죠. 함께 있을 때 좀 더 잘할 걸 하는 후회는 자식이라면 누구나 겪는 감정인 것 같아요. 밝게 웃으시는 그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지만 언제나 가슴 속에 담아 놓을게요. 그렇게 우리 가족은 영원한 헤어짐의 통과의례를 거치고 있는가 봐요.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삶에 대한 열정과 근면함을 잃지 않고, 어디서든 꼭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살아계실 때 입에 잘 담지 못했던 말, 돌아가신 지 한참이 지난 이제서야 드립니다. 아버지,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아들 조성진 씨지브이(CGV) 전략지원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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