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죽음과도 열심히 싸우셨습니다故 조○○

어머니는 죽음과도 열심히 싸우셨습니다

어르신, 저 왕진의사예요. 제가 어르신 댁을 찾아갔을 때 불러드린 대로 그냥 어머니라고 부를게요. 괜찮으시겠죠?

어머님 돌아가신 지가 벌써 6개월이 되어 가는데 기억은 하나도 녹슬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뵈었을 때 침대에서 못 나오면서도 침상 위에 미리 깎아둔 사과를 권하며 “더 먹어. 더 먹어” 하셨던 일. 무릎 관절이 오그라들면서 펴지지 않는 게 걱정되어 침대 안에서라도 무릎 펴는 운동을 열심히 하라 제가 권할 때도 “그래. 이 무릎 안 펴지면 관 뚜껑도 안 닫힌다는 거지!” 라고 농담을 하며 웃으셨던 일. 그런 사소한 일들이 생각납니다. 그때 뵙고 한 달 후에 돌아가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의지만 있으면, 조금만 도와드리면 계속 사실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일해야 산다.’ 처음 제가 어머님 댁을 방문진료 갔을 때 마루에 걸려있던 가훈입니다. 돌아가신 남편분의 좌우명이기도 했다는 그 가훈을 보며 살아오신 삶에 대해 아직 알지 못할 때였는데도 어떤 삶을 살아오셨을지 가늠이 되었어요. 그 가훈처럼 어머님은 침대 가까이 와 있던 죽음과도 정말 열심히 싸우셨습니다. 침대에서 나올 수가 없었던 마지막 몇 달. 침대에 갇혀 있어도 하루에 세 시간 이상은 요양서비스를 받을 수가 없어서 요양보호사가 없는 나머지 스물 한 시간 동안 물티슈와 기저귀, 커다란 휴지통을 침대 옆에 두고 대소변을 모두 침대 위에서 처리하셨어요. 어딜 가나 사람들로 넘쳐나는 이 세상에 피붙이 하나 없던 어머님은 이 모든 것을 혼자서 해내셨습니다. 그런 어머님 모습을 보면서 방문할 때마다 저희들 모두 안타까우면서도 ‘정말 대단하시다’ 감탄을 했어요. 정말 열심히 살아오셨듯이 침대에서 못 나오는 삶도 정말 열심히 살아내셨어요.

침대에서 나오지 못하던 당신은, 요양보호사가 챙겨주는 점심 한 끼로는 더는 버틸 수가 없어 저녁 한 끼 챙겨 드릴 분을 구하기 위해 노인기초연금 수급비 46만원을 전부 이웃에게 드리면서까지 어떻게든 집에서 살고 싶어하셨지요. 요양병원을 두어 차례 경험하시고 나서 그쪽을 향해서는 오줌도 누지 않는다며, 다시는 요양병원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는 당신에게 저는 “세상에는 좋은 요양병원도 많다”고 설득했지만 고집을 꺾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그런 당신도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는 요양병원 입소를 피하지 못하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님은 죽음과 싸운 게 아니라 한국의 요양시스템과 싸우고 있던 거였어요.

어머님의 요양병원 입원소식을 듣고 몇 번 면회를 가려 했지만 그마저도 코로나 시국 때문에 허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몇 주 후 결국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저는 이 땅에서 잘 죽는 일은 의지만으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방문 재활치료가 불가능한 이곳에서 어머니가 침상에서 벗어나는 일은 오를 수 없는 높은 산이었고 침대에서 내려와 발바닥이 땅에 닿는 순간은 끝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어요. 죄송해요.

어머니를 그렇게 보내드리고 나서 정말 반성을 많이 했어요. 그때 침대에서라도 전문적인 재활치료를 받게 해 드렸다면 더 오래 사실 수 있었을 텐데 저는 방문 물리치료라는 제도가 없기 때문에 그냥 불가능하다고만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도는 없어도 사람은 있습니다. 그 이후로 저희 방문진료팀에 합류해주시는 물리치료사가 생겼거든요. 그리고 며칠 전. 어머님처럼 침대에서 못나오시던 할머니가 기적을 경험했어요. 물리치료사가 방문해서 재활치료를 해준 후로 보행보조기에 의지해 혼자 힘으로 마당까지 나오셨거든요. 너무 놀라워 저절로 박수가 쳐지더라고요. 할머니의 보호자분은 저희에게 “정말 고맙다”하지만 그 인사를 받아야할 분은, 실은 어머님이세요. 그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또 한 번 어머니께 죄송해졌더랬습니다.

2장

얼마 전 어머님이 살던 집을 찾아간 적이 있어요. 잠겨 있지 않는 집 대문 앞에는 의자 하나 덩그러니 남아 있었습니다. 의자 바닥에 손을 올려봤어요. 따스했습니다. 하지만 온 세상을 따뜻하게 내리쬐는 태양도 한사람이 앉아 있던 자리의 온기를 대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거기에 앉아 계셨던 어머님의 체온은 이제 남아있지 않지만 제 마음 속 기억은 아직도 또렷합니다. 저희 보고 따가라 하셨던 마당의 앵두나무도, 그 마당에서 스무 살에 시집오던 당신을 바라봤다던 키 큰 살구나무도 모두 그 자리에 긴 가지를 내밀고 서서 어머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면회도 되지 않는 요양병원에서 고립되어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돌아가셨던 어머님처럼, 어머님의 집도 이제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이 혼자 늙어가고 있습니다.

어머님을 뒤따르는 이들을 오늘도 왕진 가서 만나고 옵니다. 그 분들이 어머님과는 조금 다른 길을 갈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남아있는 저희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잘 해낼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먼 훗날 저희가 어머님을 뵐 때 덜 부끄럽도록 저희도 노력하겠습니다.

- 호호방문진료센터 양창모 올림.

58분이 헌화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