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말 안 끝났습니다. 말 자르지 마시고요!” “제가 0.1초 먼저 일어났으니 먼저 말하겠습니다.” 17일 서울중앙지법 510호 법정. 증인신문을 두고 다투던 검찰과 변호인이 ‘발언 순서’를 놓고 목청을 돋웠다. 한참 고성이 오가다 결국 ‘0.1초 먼저 일어났다’는 변호인이 발언권을 잡았다.
불법 정치자금 ‘9억원 수수’ 혐의를 두고 벌이는 검찰과 한명숙(67) 전 국무총리 쪽의 공방이 ‘감정싸움’으로 치닫고 있다. 증인신문을 비롯한 재판 절차는 물론 저녁식사를 위한 휴정 같은 사소한 것을 놓고도 양쪽이 사사건건 맞서는 통에 큰소리가 나고 귀에 거슬리는 표현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날 저녁 한 전 총리의 지역구 관리인인 김아무개(51·여·불구속 기소)씨가 코피를 흘리며 나가자 임관혁 검사는 “특별한 질병이 없는데도 쓰러지는 버릇이 있다”며 “재판 진행에 지장을 주니 의료기관에서 진단서를 받길 바란다”고 말했다. 증인으로 나온 ㅎ건영 전 경리부장 정아무개씨가 ‘한번 더 나와달라’는 변호인의 요구에 응할 수 없다고 하자 검찰과 변호인이 이를 두고 다투다 나온 말이다. 권영빈 변호사는 “증인한테 (출석을) 애걸해야 하느냐. 법정에 권위가 없다”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방청객들의 태도를 놓고도 양쪽은 날을 세웠다. 검사의 말끝에 웃음소리가 들리자 엄희준 검사가 반발했고, 조광희 변호사가 “웃음일 뿐”이라며 넘기려 들자 엄 검사는 “욕설은 안 되고 웃음은 되느냐”며 반박하기도 했다. 김우진 재판장의 입에선 “이 얘기 하다가 또 1시간이 지났는데요”, “이러다 또 시간이 가는데요”라는 말이 자주 나왔다.
양쪽이 이처럼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는 까닭은 ‘절박함’ 때문으로 보인다. 검찰은 지난해 ‘5만달러’ 사건 1심 무죄 판결로 입은 내상이 깊은데다 이번에도 돈을 준 사람(한만호 전 ㅎ건영 대표)이 진술을 갑자기 번복하면서 남은 공판에 사활을 걸고 있다. 변호인들도 공여자의 진술 번복 뒤 나온 증인들이 그와 상반된 증언을 하면서 무죄 입증을 자신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감정싸움에다 절차를 둘러싼 양보 없는 공방이 계속되면서 길어지기 시작한 공판은 지난 4일 12시간20분, 11일 17시간, 18일 9시간30분 동안 계속됐다. 그러나 정작 공소사실 자체의 심리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계획된 신문이 미뤄지는가 하면, 대질신문을 위해 나와 기다리던 증인들은 법정에 서지도 못한 채 한밤중에 그냥 돌아갔다. 재판장이 소송 지휘를 야무지게 하지 못해 이런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재판부는 공판 절차 등을 다시 논의하기 위해 오는 31일 ‘공판준비기일’을 따로 열기로 했다.
송경화 노현웅 기자 freehw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