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섭 |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12월3일 야밤의 비상계엄은 역사책 속에 잠들어 있던 군사 쿠데타의 악몽을 되살렸다. 헬기가 출동하여 병력이 국회에 진입하고 의사당 창문을 깨는 장면이 2024년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벌어졌다. 방첩사령관, 특전사령관, 정보사령관 등 우리 군의 핵심 장성들이 내란 음모를 기획하거나 이에 관여한 사실도 속속 드러났다. 물론 이번 사태는 군이 민간 정부를 전복하는 전형적인 군사 반란은 아니다. 내란의 명령이 위에서 내려온, 대통령이 정점에 있는 일종의 친위 쿠데타였다. 영문도 모른 채 불법적 임무 수행에 연루된 장병들 역시 피해자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계엄령 사태가 민주주의와 민-군 관계라는 중요한 화두를 우리 사회에 다시 한번 던졌다는 점이다.
한 공동체가 군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군이 사회를 위협할 수 있는 무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역설이 민-군 관계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방 정책을 군이 주도할 경우 나타나는 부정적 효과도 통제할 필요가 있다. 국방 예산, 군의 규모, 복무 기간, 군사 전략 등 거의 모든 군사 문제가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를 보호하는 임무를 군에 맡기되, 사회는 이에 대한 지휘와 감독을 포기할 수 없다. 다만, 이때 중요한 것이 위임과 감독의 균형 문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적으로부터 구해달라’는 백지위임도 곤란하지만, 정치인이 직접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진격 명령을 하달하는 극단적 감독도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문성을 갖춘 군에 일정 정도의 위임을 하되 적절한 수준에서 이를 감독할 수 있는 역량과 권위를 갖춘 제도적 기반이 요구된다. 입법과 예산 권한을 보유한 의회의 역할이 대표적이다. 민주당이 계엄 준비 정황을 수개월 전부터 경고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의회는 군 내부의 문제를 외부에 알리는 조기경보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언론, 학계, 시민단체의 국방에 대한 관심과 소양의 수준도 한 나라 문민통제의 깊이에 영향을 미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국방부의 역할이다. 국방부라는 존재가 당연시되는 경향이 있으나 국방부의 역사는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다. 국방부라는 조직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다. 육군성과 해군성을 통해 전쟁을 수행했던 미국이 군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전후에 국방부를 만들었던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세계 각국에 국방부가 설치된 것도 당시 일었던 민주화 물결의 산물이다. 이로써 군은 황제나 대통령 등 최고 권력자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지위에서 내각의 통제를 받는 자리로 위치 지어진 것이다. 이렇듯 선출된 문민 지도자와 군을 연결하는 장치가 국방부다. 따라서 국방부가 본래 기능에 충실하지 못하면 방대한 인적·물적 자원의 효과적 활용, 각 군 경쟁의 통제와 합동성 발휘 등이 어려워지고 군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선 아직도 국방부를 단순히 합참과 각 군 본부의 상급 제대로 바라보는 인식이 남아 있다. 그러다 보니 국방부 주요 직위가 현역과 예비역 장성으로 채워지고, ‘육방부’라는 소리가 나오곤 한다. 그러나 이번 계엄 사태에서도 보듯이 국가 무력의 상층부를 특정 사관학교 출신이 독점하고 있는 현실은 민주주의에 잠재적인 부담 요소다. 사관학교뿐 아니라 학사·학군(ROTC) 장교 출신도 미국처럼 군 고위층의 주력으로 진출할 수 있는 균형적 인력정책이 필요한 이유다. 3군 균형 발전, 병과 이기주의 극복도 중요하다. 모두 군 내부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민간 관료가 있어야 가능한 과제들이다. 문민 국방부 장관 논의 역시 이러한 국방부의 존재 이유와 역할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민-군 관계의 발전은 민주주의 성숙의 문제이기도 하다. 문민통제의 초기 목적은 민주주의의 붕괴를 막는 것이지만, 쿠데타 방지는 그 출발에 불과하다. 민주주의의 심화를 위해서는 주요 국방 정책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확보해야 하고 사회 전체의 문민 기반이 탄탄해져야 한다. 민주주의 완성에 종착역이 없듯이 문민통제도 끊임없이 발전시켜야 할 민주 사회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지키는 자를 누가 지킬 것인가?’(who guards the guardian?)라는 고민은 계속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