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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을 이용해 일본에 다녀왔다. 2012년 봄에 방문한 이후 일년 반이 지난 시점의 이번 일본 방문 과정에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싸졌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엔화를 바꾸는 과정에서부터, 귀국하기 직전 후쿠오카 공항에서 마시기 위해 커피를 한잔 주문하는 순간까지 같은 느낌이 반복됐다.

2012년 봄, 엔화로 표시된 가격표를 볼 때마다 습관적으로 1.5를 곱하고 다시 10을 곱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10만 곱했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엔화로 표시된 일본의 생필품이나 음식값은 거의 그대로였다. 700엔짜리 라면은 당시 1만원을 넘었지만 이제 7000원이고, 아들을 위해 산 200엔짜리 볼펜은 3000원에서 2000원으로 내린 셈이다. 물론 2007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는 이보다 훨씬 더 쌌다. 당시에는 처음 곱하는 값이 0.8이었다. 하지만 느낌은 조금 달랐었다. 2007년에는 2년에 걸쳐 원-엔 환율이 20% 정도 떨어졌는데, 이번에는 불과 1년6개월 만에 하락폭이 30%를 넘어섰다.

일본 방문기를 길게 이야기하는 건, 2014년 새해 우리 앞에 놓인 가장 큰 위험 가운데 하나가 결국 엔화 약세로 보이기 때문이다. 엔화는 2013년 중반의 1차 약세기를 거쳐 이제 2차 약세기로 접어든 상황이고, 이는 일본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각종 분야에서 지금과는 다른 현상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전체 수출이라는 큰 흐름에서 엔화 약세가 우리 수출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 것인가는 아직 불확실하다. 우리 수출에 영향을 미치는 제일 중요한 요소는 글로벌 경제의 성장과 교역량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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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보더라도 환율이라는 상대가격은 과거에 견줘 수출에 미치는 영향이 많이 줄었다. 시차를 고려해 상관관계를 구해도 원-엔 환율과 수출 증가율은 크게 의미있는 관계를 나타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최근 엔화 약세에 대해 “우려는 되지만 별일은 없을 것”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고환율, 즉 낮은 원화가치 정책이 수출기업들에만 혜택을 주고, 가계의 실질구매력에는 도움을 주지 못하므로, 오히려 원화가치가 적절하게 자기 가치를 찾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맞는 얘기다. 높은 환율은 수출기업들의 외화표시 가격 경쟁력을 유지시키고 원화표시 실적을 높이는 반면, 가계는 상대적으로 높은 물가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 의도적인 환율 방어는 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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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원화가치에 대비한 엔화가치의 하락은 속도가 빠르고 폭이 가팔라 우려된다. 특히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가 진행되면서 달러 대비 엔화의 약세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반면, 한국은 이른바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국으로서 달러 대비 원화 가치가 오를 수도 있는 처지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뜯어보면 투자 감소에 따라 연간 수입 증가율이 0.4%에 불과한 불황형 흑자지만, 여하간 경상수지 흑자규모가 연간 600억달러를 넘어서고 있어 적자국과 뚜렷한 대비를 보이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는 장기적인 원화가치 절상 기대를 가질 가능성이 큰 환경인 것이다.

추가적인 엔화가치 하락 속도와 폭도 문제지만, 일본 기업과 우리 기업의 경합 관계가 높다는 점도 문제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한국의 10대 수출 품목과 일본의 10대 수출 품목은 6개가 겹친다. 석유화학, 전기전자, 승용차, 선박 등 주요 수출기업들이 망라돼 있다는 얘기다. 일본 수출업체들은 이미 2012년 말보다 10% 정도 달러표시 수출단가를 인하했다. 통화가치 하락의 3분의 1 수준을 가격 인하에 사용할 만큼 여유가 생겼다는 의미다. 당연히 어떤 상품의 구매가 가격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상품의 매력도, 그 안에 포함된 기술력 등이 모두 구매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즉 제품의 가치 대비 가격이 중요하다. 하지만 일부 품목을 제외하면 일본제 제품의 매력도와 기술력이 한국산에 비해 열등하다고 볼 이유가 없다. 오히려 많은 산업재와 더 많은 소비재에서 일본 기업은 원천기술을 바탕으로 강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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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격 측면을 제외하고 물건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다른 요소가격들이 오랜 기간 안정돼 왔다는 점도 일본의 강점이다. 구조조정을 늦춘 것이 일본의 가장 큰 실패 요인으로 지적되고는 있지만, 어쨌든 장기간에 걸쳐 부동산 거품이 꺼진데다, 금리가 낮고 인건비 상승 폭이 제한돼 온 것 역시 사실이다.

물론 단기간에 빠른 속도로 엔화 약세가 진행됐기 때문에 미국이나 유럽이 엔화 약세에 제동을 걸 가능성이 있다. 그동안 미국이 안보나 경제협력 등을 이유로 엔화 약세를 어느 정도 용인해 온 것이 사실이지만, 내부적인 압력과 낮은 물가 등을 고려할 때 이를 한도 끝도 없이 용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엔화 약세를 무기로 일본의 제조업 경쟁력이 다시 커지는 것은, 미국을 제조업 기지로 만들려는 오바마 행정부에 분명 위협적이다. 이에 따라 각종 구실을 만들어 엔화 약세를 저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조금은 숨을 돌릴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낮은 물가에도 각종 부작용을 우려해 양적완화를 축소할 수밖에 없는 미국의 상황, 그리고 정치적 위험을 동반한 소비세 인상을 강행할 만큼 디플레이션 탈출에 목을 맨 일본의 상황을 동시에 고려할 때, 엔화 약세 기조가 쉽게 반전되긴 어려워 보인다. 급속한 고령화로 경제의 활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일본 입장에서 지금의 정책은 국운을 결정짓는 중요한 실험이고, 그만큼 일본 정부는 더 절박할 것이다.

이번에 일본에 머무는 동안 싸다는 느낌 때문에 좋고, 편했다. 서울에서와 비슷한, 혹은 더 싼 음식값을 보며 사실 조금 우쭐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문득 ‘올해 우리 경제가 만만치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화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최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