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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11일 시엔비시(CNBC)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발언하고 있다. CNBC 화면 갈무리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11일 시엔비시(CNBC)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발언하고 있다. CNBC 화면 갈무리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한국은 일본과 같은 내용으로 관세 협상 합의문을 쓰지 않으면 고율 관세를 물어야 한다고 압박했다. 7월30일에 큰 틀에서 합의된 관세 협상의 후속 협의를 놓고 백기투항을 요구한 셈으로, 진행 중인 협상에 상당한 험로가 예상된다.

러트닉 장관은 11일(현지시각) 시엔비시(CNBC)에 출연한 자리에서 “한국은 (이재명) 대통령이 백악관에 왔을 때 (합의문에) 서명하지 않았다”며, 지난달 25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관세 합의를 구체화한 문서가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상기시켰다. 이어 “일본은 계약에 서명했다”며 “한국은 합의를 받아들이거나 관세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러트닉은 “그들(한국)은 일본인들을 지켜봤을 것이고, 그래서 유연함은 없다”고도 했다.

이런 발언은 상호관세율과 자동차 품목 관세율 인하의 대가로 3500억달러(약 486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펀드 조성을 약속한 한국도 5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펀드 조성을 약속한 일본과 같은 내용으로 양해각서(MOU)에 서명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앞서 미·일은 일본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정하는 사업에 투자금을 대고, 수익은 원금 회수 때까지는 양쪽이 50 대 50, 이후로는 90 대 10으로 분배한다는 내용의 합의를 했다. 이에 따라 트럼프는 일본에 상호관세율 15%를 적용하고 일본산 자동차 품목 관세율도 27.5%에서 15%로 낮춘다는 종전 합의를 이행하기로 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조정된 자동차 관세율은 16일부터 적용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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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 합의 이후 나온 미국 정부 설명과 외신 보도를 보면, 미국이 요구한 시점으로부터 45일 안에 일본이 투자를 이행하지 않으면 관세가 도로 올라간다는 내용도 합의에 포함됐다. 이에 일본에서는 투자처 지정, 투자금 배분, 관세 복구 조건 등을 두고 미국의 무리한 요구에 굴복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러트닉은 이번에도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개발 사업을 예시하면서 “대통령이 승인하면 건설 인력을 고용하고 일본에 자본을 요구한다”며 “그들은 돈을 보내고 우리는 파이프라인을 만든다”고 했다.

미국은 7월30일 관세 협상 타결에 따라 한국 상품에 대해 경고한 상호관세율을 기존 25%에서 15%로 낮춰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품목 관세 대상인 자동차는 약속대로 15%로 내리지 않고 여전히 25%를 적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본산 자동차 관세율이 16일부터 15%로 내려간다면 한국산 자동차의 가격 경쟁력은 약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러트닉의 이번 발언은 자동차 품목 관세를 계속 내리지 않을 뿐 아니라 한국 상품 전반에 대한 상호관세율을 25%로 올릴 수 있다고 경고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관세 합의를 전면 무효화할 수 있다고 협박한 것으로도 볼 수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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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부는 미국의 요구가 지나치고, 미·일 합의 내용도 그대로 따를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이 대통령은 11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이익이 되지 않으면 사인을 안 하는 게 맞다”며 “합리성과 공정성에서 벗어난 어떤 협상도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정부는 막대한 돈을 미국이 요구하는 분야에 대고 수익은 미국이 상당 부분을 가져간다는 것으로 이해되는 미·일 합의 내용을 따른다면 국내 여론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정부는 한·미 조선업 협력 사업인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에 투입하겠다고 밝힌 1500억달러를 비롯해 3500억달러 투자 펀드가 반도체·인공지능(AI)·원자력·이차전지를 포함하는 양국의 첨단·전략 산업 협력과 한국 업체들의 대미 투자에 쓰인다고 설명한 바 있다. 펀드는 5% 미만의 직접투자와 함께 대출이나 대출 보증으로 구성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러트닉의 설명대로라면 미국이 지정하는 분야에 투자해야 하며, 한국 업체들의 참여는 보장되기 어려워 보인다. 다만 미·일 합의에는 일본의 투자로 진행되는 사업에 들어가는 물품과 서비스 공급 업체로는 가능하다면 일본 업체를 선정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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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트닉의 발언은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후속 협의를 위해 워싱턴에 도착한 날 나온 것이기도 하다. 자신들의 입장을 명확히 해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어 보인다. 최근 산업부와 기획재정부 관계자들로 구성된 실무 협상팀이 워싱턴에 미국 쪽과 이견 해소를 시도했지만 뚜렷한 진척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로이터 통신은 한국의 포스코인터내셔널이 알래스카 프루도베이 가스전 개발 사업과 관련해 20년간 액화천연가스를 연간 100만t씩 도입하는 내용의 예비 계약을 미국 업체와 맺었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계약에는 1300㎞ 길이의 파이프라인 건설을 위한 철강 공급에 포스코가 참여한다는 내용도 들어갔다. 미국 정부는 수십년 동안 추진됐으나 상업성에 대한 의문으로 착수되지 않고 있는 이 사업에 대한 한국의 대규모 투자를 요구하고 있다. 정부는 사업 성공 가능성에 대한 미국 쪽의 추가적 설명을 검토한 뒤 판단한다는 입장이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